축축하거나 촉촉하거나: 명제적 의미와 표현적 의미

갈등하는 번역 온라인레슨 2

[갈등하는 번역 2. 축축하거나 촉촉하거나: 미묘한 감정과 태도의 차이]에서 자세한 설명과 예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borje

명제 proposition

“의자”

코드 code

‘명제’는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대상이나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컨대 위에 있는 그림(명제)을 보고 “의자”라고 말한다면, 그림에 보이는 대상을 “의자”라는 기호(=코드)로 코딩encoding한 것입니다. (말로 하면 ‘소리기호’일 것이고 글로 쓰면 ‘시각적 기호’일 것입니다.)

명제를 찾아내는 것은 말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작업입니다. 청자 또는 독자가 나열된 코드에서 명제를 복원decoding해낼 수 있다면 일단 정보를 전달(=커뮤니케이션)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하지만 똑같은 명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화자의 감정이나 태도에 따라 다른 어휘가 선택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물기가 많은 상태를 어떤 사람은 ‘축축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촉촉하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 어떤 사람이 ‘축축하다’라는 어휘를 사용했다면- 그 사람이 ‘촉촉하다’라는 말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 어떤 사람이 ‘촉촉하다’라는 어휘를 사용했다면- 그 사람이 ‘축축하다’라는 말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어휘는 말하는 사람의 감정, 태도에 따라 다르게 선택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휘나 표현에 반영되는 말하는 사람의 감정이나 태도를 우리는 ‘표현적 의미’라고 합니다.

어휘 명제적 의미 propositional meaning 표현적 의미 expressive meaning
촉촉하다 물기가 많다 이 상태의 느낌이 좋다
축축하다 물기가 많다 이 상태의 느낌이 좋지 않다

똑같은 기온을 묘사하는 데에도 어떤 사람은 ‘서늘하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시원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 역시 명제적 의미는 같지만 표현적 의미가 다르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명제적 의미와 표현적 의미는 글을 쓸 때(encoding)나 글을 읽을 때(decoding) 모두 중요합니다. 디코딩과 인코딩이 거의 동시에 발생하는 ‘번역과정’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겠죠.

명제적 의미를 잘못 코딩하면 전혀 엉뚱한 정보를 전달하는 말이 될 것이고, 표현적 의미를 잘못 코딩하면 저자의 감정이나 태도, 더 나아가 그 말을 하는 의도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 How can you be so unkind?
  • How can you be so cruel?

위의 두 표현은 모두 상대방의 태도를 못마땅해하는 화자의 감정을 전달합니다. 하지만 ‘unkind’라는 표현보다는 ‘cruel’이라는 표현을 선택했을 때 상대방을 비난하는 태도가 더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이러한 표현적 의미의 차이는 번역문에서도 그대로 드러나야 합니다. (‘원칙적으로’라는 한정조건qualification을 붙인 이유는 실제 번역과정에서 이러한 원칙을 달성하기 어려울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명제적 의미는 사전에 나오지만 표현적 의미는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번역자는 동일한 명제적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을 비교해보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다르게 사용되는지 민감하게 감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뉘앙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실은… 동일한 명제를 지칭할 수 있는 여러가지 단어나 표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곧 말을 하려면 우리는 어쨌든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말을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끊임 없는 선택작업입니다. 물론 말은 선택할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잘못된 표현을 선택할 개연성도 있지만, 글을 쓸 때는 그 효과를 고려하고 계산하여 선택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결국 모든 단어의 선택, 표현의 선택에는 화자/저자의 의도가 철저히 반영된다는 뜻이고, ‘선택의 의미비중’은 말보다 글에서 훨씬 높습니다. 글을 다루는 번역가는 그만큼 저자의 의도를 민감하게 파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말에는 의도meaning!가 있으며 그것이 곧 의미meaning!입니다.

디코딩(원문읽기)은 ‘의미/의도’를 파악하는 작업이고, 그렇게 파악해낸 ‘의미/의도’를 표현하는 작업이 바로 인코딩(번역문쓰기)입니다. 그래서 번역자는 ‘코딩기술’도 뛰어나야 하겠지만 의미/의도를 제대로 찾아내기 위해서는 ‘이해력’도 뛰어나야 합니다.

By | 2017-02-15T13:23:37+00:00 2016년 1월 4일|Categories: 갈등하는 번역, 온라인 번역레슨|Tags: |0 Comments

About the Author:

번역가. 영국 버밍엄대학 대학원에서 번역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출판기획, 편집, 저술 등 활동을 하면서 40여 권의 책을 번역하였다. 출판번역가를 양성하기 위한 번역강좌를 하고 있으며, 기능주의 번역이론을 바탕으로 번역훈련방법을 설명하는 [갈등하는 번역]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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