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트와 코멘트: 의미장과 어휘집합

갈등하는 번역 온라인레슨 3

이 레슨은 [갈등하는 번역 1부. 단어 수준의 번역 문제들]에서 다루는 내용을 포괄하는 기초적인 언어학 지식을 설명합니다.

흔히 이누이트 말에는 ‘눈’을 일컫는 단어가 수십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akitla: 물 위에 떨어지는 눈
  • briktla: 잘 뭉쳐진 눈
  • carpitla: 얼음으로 유리처럼 변한 눈
  • kriplyana: 이른 아침 푸른 빛으로 보이는 눈
  • kripya: 녹았다가 다시 언 눈
  • rotlana: 급속히 늘어나는 눈
  • shlim: 눈 찌꺼기
  • sotla: 햇빛과 함께 반짝이는 눈
  • tlapa: 가루눈
  • tlapat: 조용히 내리는 눈
  • tlapinti: 빨리 떨어지는 눈
  • tlaslo: 천천히 떨어지는 눈
  • tlaying: 진흙과 섞인 눈
  • trinkyi: 그 해의 첫 눈

이누이트 말에서 눈에 대한 어휘가 세분화되고 발달한 것은, 눈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눈이 한국에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국어에 그것을 일컫는 특별한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국인들은 이와 같은 눈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지 그것을 구분해서 인지하고 전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언어란 곧, 자신들의 경험을 인위적으로 구분하고 분류한 결과물입니다. 다시 말해 언어란 불연속적인 현상을 인위적으로 구별하여 그것에 이름표를 붙인 인식의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학에서는 ‘SNOW’를 ‘의미장’이라고 하고 그 의미장에 속한 다양한 낱말들을 ‘어휘집합’이라고 합니다.

의미장 semantic field 어휘집합 lexical set
SNOW

  • 함박눈
  • 싸락눈
  • 가루눈
  • 날린눈
  • 진눈깨비

이것은 한국어의 ‘눈’이라는 의미장 속에 존재하는 대표적인 어휘집합을 모은 것입니다. (물론 좀더 깊이 파고들면 훨씬 많은 표현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다른 예로, 영어에서 ‘SPEECH(말하는 행위)’를 묘사하는 의미장에는 다음과 같은 어휘들이 있습니다.

  • say something remark, comment, point out, mention, observe, utter
  • use particular words put it, phrase, be worded
  • say in an indirect way imply, suggest, hint
  • say something suddenly exclaim, come out with, blurt out
  • say something quietly murmur, mutter, mumble, whisper
  • say something in a low voice growl, snarl, grunt
  • say something in a particular way pronounce

이러한 어휘에 각각 해당하는 한국어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예컨대 ‘hint’나 ‘comment’ 같은 어휘에 해당하는 한국어는 마땅히 찾을 수 없어 흔히 ‘힌트를 주다’나 ‘코멘트를 하다’와 같이 영어를 그대로 들여와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외래어를 한국어화자들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회가 점차 복잡해지면서 이러한 행위가 현실에서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으로 인식되고 그것을 언급해야 할 필요성은 커지는 반면, 그것을 일컫는 ‘이름표’가 한국어 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한국문화에서는 이런 행위를 구별해서 일컬어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언어로 ‘코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문화의 발전속도와 언어의 발전속도 사이에 격차가 발생할 때 외국어의 차용은 매우 유용하고도 편리한 해결책이 됩니다.

물론 다른 언어보다 한국어에서 발달한 의미장도 있습니다. 기온을 묘사하는 어휘들(추운, 차가운, 싸늘한, 서늘한, 선선한, 시원한, 포근한, 따듯한, 더운, 뜨거운 등)이나 가족관계를 묘사하는 어휘들(이모, 삼촌, 숙모, 고모, 올케….)은 영어나 유럽어에 비해 매우 다양하게 세분화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 드라마를 통해 한국어의 ‘오빠’라는 단어와 사람 이름 뒤에 붙이는 ‘~씨’라는 호칭이 외국에 그대로 전파되고 있다는 소식을 보았는데, 이것 역시 관계를 정의하는 호칭이 한국만큼 발달하고 세분화한 문화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의미장과 어휘집합은 자연환경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사회적 정치적 환경에 영향을 받아 구축되기도 합니다.

의미장은 “언어가 세상의 실재를 반영하기보다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관심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 인간은 실재하는 세상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선별해서 (=필요한 것만) 인식합니다. 자신들이 처한 환경에 따라 필요하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는데, 이것이 곧 문화(=생활양식=사고방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는 그들이 사용하는 말, 즉 ‘언어’로 체계화됩니다(그래서 언어는 곧 문화입니다). 따라서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 InterCultural Communication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출발언어와 도착언어가 경험적 세계를 분류하고 인식하는 방법이 어떻게 다른지 포착해낼 줄 알아야 합니다.

의미장이 번역가에게 중요한 이유는, 번역과정에서 등가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적절한 번역어를 찾기 위한 나침반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위의 어휘집합 중에서 ‘phrase’는 선택한 어구에 초점을 맞춘 표현인 반면 ‘be worded’는 선택한 단어에 초점을 맞춘 표현인데, 한국어에서는 이러한 차이를 이처럼 효과적으로 구분하는 낱말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번역가는 어쨌든 세상을 인지하는 관점의 차이를 넘어 적절한 번역어를 찾아야 합니다. 단순히 사전에 실린 번역어를 참조하기보다는 한국어의 ‘말하다’ 의미장에 속한 어휘들을 검토하고 비교하여 적절한 어휘를 찾아낼 줄 알아야 합니다.

By | 2017-02-15T13:23:37+00:00 2016년 1월 12일|Categories: 갈등하는 번역, 온라인 번역레슨|0 Comments

About the Author:

번역가. 영국 버밍엄대학 대학원에서 번역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출판기획, 편집, 저술 등 활동을 하면서 40여 권의 책을 번역하였다. 출판번역가를 양성하기 위한 번역강좌를 하고 있으며, 기능주의 번역이론을 바탕으로 번역훈련방법을 설명하는 [갈등하는 번역]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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