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없는 사슴: 번역할 수 없는 어휘들

갈등하는 번역 온라인레슨 11

이 레슨은 [갈등하는 번역 PART 1. 단어수준의 번역문제들]에서 다루는 내용을 설명합니다.

실제로 번역을 하다보면 문화특수항목은 물론 적절한 등가어equivalence를 찾기 힘든 어휘나 표현을 자주 마주칩니다. 이러한 개념이나 어휘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유형별로 간략하게 정리해봅니다.

1. 문화적으로 특수한 개념 Culture-Specific concept

12월의 산들바람: 문화특수어휘 참조.

2. 도착언어에 어휘화 되어 있지 않은 개념

service, utility와 같은 개념은 한국어에 어휘로 할당되어 있지 않습니다.

3. 의미가 지나치게 복잡한 어휘

extension이라는 말은 “전기플러그에 닿을 수 있도록 콘센트를 연장하여 이어주는 선”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어휘는 번역하기가 매우 까다롭습니다.

4. 의미를 구분하는 기준이 다른 어휘

aunt와 같은 말은 우리말에서 친족관계인지 아닌지, 친가인지 외가인지에 따라 전혀 다르게 옮겨야 합니다. 힌트와 코멘트: 의미장과 어휘집합 참조.

5. 상위어가 없는 개념

구체적인 개념들은 어휘화되어 있지만 이들을 포괄하는 어휘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자동차, 트럭, 자전거, 유모차와 같은 말은 있지만, 이들을 모두 총칭하는 “바퀴 달린 모든 것”을 의미하는 vehicle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없습니다. 힌트와 코멘트: 의미장과 어휘집합 참조.

6. 하위어가 없는 개념

포괄적인 개념어는 있지만 구체적인 개념이 어휘화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jump는 “뛰어오른다”는 포괄적인 개념이지만, leap, vault, spring, bounce, dive, clear, plunge, plummet과 같이 구체적으로 뛰는 행동을 낱낱이 묘사하는 우리말은 없습니다. 힌트와 코멘트: 의미장과 어휘집합 참조.

7. 관점이나 관계의 차이

시점을 어디에 둘 것인지, 대상이 사람인지 사물인지, 상대방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따지는 기준이 언어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영어의 경우 ‘기준이 되는 대상과 어떻게 접촉하느냐’에 따라서 mount, climb, rise, ascend를 구분해서 사용하지만 우리말에서는 ‘상하위치이동’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모두 “오른다”라는 말로 번역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I”는 상대방과의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반면, 한국어에서는 ‘상대방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나” “저” “소인” 등으로 바꾸거나 생략을 해야 합니다. 힌트와 코멘트: 의미장과 어휘집합 참조.

8. 뉘앙스의 차이

batter는 마구 두들기거나 구타해서 망가뜨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말을 단순히 “때리다”라는 말로 옮기면 중립적인 의미가 되어버립니다. 이 경우, 맥락에 따라 “잔인하게”나 “무지막지하게”와 같은 수식어를 붙여 등가를 맞춰야 합니다. 축축하거나 촉촉하거나: 명제적 의미와 표현적 의미 참조.

9. 어휘형태의 차이

특히 시나 유머를 번역할 때 자주 마주치는 문제로 형태의 차이 때문에 출발언어의 “말맛”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What do you call a deer with no eyes?”
“No idea”
“눈이 없는 사슴을 뭐라 부르지?”
“?몰러”

번역을 해 놓으면 어휘형태의 차이로 인해 출발언어의 유머는 사라져버리고 무의미한 내용이 되어버립니다. (No idea는 No eye deer[눈이 없는 사슴]과 발음이 같습니다.)

10. 어휘형태의 사용빈도의 차이

어휘적으로 같은 의미를 지닌 말이 있다고 해도 사용빈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영어에서 동사를 명사형으로 바꿔주는 “~ing”는 우리말에서 “~것”으로 바꿀 수 있지만 영어에서 “~ing”는 매우 흔하게 사용되는 반면 우리말에서 “~것”은 영어만큼 빈번하게 사용되지 않습니다. “~ing”를 무작정 “~것”으로 바꾸다 보면 “것~것~것”이 연속되는 문장이 나와 낯설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11. 차용어의 효과의 차이

많은 저자들이 다양한 의도로 외래어를 사용합니다. (대개 글에 세련미를 더하고 격조를 높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영어저자들의 경우 “au fait” “alfresco” “status quo”와 같은 말을 자주 쓰는데 이들을 “정통하여” “야외에서” “현상태”라고 옮기면 이러한 차용어의 효과가 사라져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또한 차용어를 옮길 때 늘 주의해야 할 요소가 있는데, 바로 “거짓유사어false friend/faux ami”라는 현상입니다. 예컨대 영어에서 사용하는 “madam”이라는 호칭과 우리말에서 “마담”이라는 호칭이 형태는 같지만 그 사용방식과 연상되는 의미가 달라집니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달라지는 언어: 방언과 사용역 참조.

특히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중국어나 일본어를 번역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거짓유사어를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똑같은 어휘라고 해도 사용되는 의미가 전혀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살펴본 비등가의 문제는 “어휘”만을 놓고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휘측면에서 등가를 찾을 수 없다고 해서 번역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닌 뜻입니다. 어휘차원에서 등가를 맞추지 못하면, 문장차원에서 또는 텍스트차원에서 등가를 맞출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전문번역가들의 고차원적인 번역기술입니다. 번역을 한다는 것은 개별적인 어휘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텍스트”를 옮기는 작업이라는 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물론 전체적인 텍스트의 흐름에 있어 핵심이 되는 어휘는 그 의미가 도착언어에서도 그대로 살아날 수 있도록 옮기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텍스트의 전체적인 흐름보다는 어휘 그 자체로 대부분 의미를 전달하는 유머나 시를 번역하는 작업은 어렵습니다. (사실, 그런 텍스트라면 번역해야 할 이유부터 다시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By | 2017-02-15T13:23:37+00:00 2016년 3월 21일|Categories: 갈등하는 번역, 온라인 번역레슨|0 Comments

About the Author:

번역가. 영국 버밍엄대학 대학원에서 번역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출판기획, 편집, 저술 등 활동을 하면서 40여 권의 책을 번역하였다. 출판번역가를 양성하기 위한 번역강좌를 하고 있으며, 기능주의 번역이론을 바탕으로 번역훈련방법을 설명하는 [갈등하는 번역]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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