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먹을까, 그릇을 먹을까: 문법요소와 어휘요소

갈등하는 번역 온라인레슨 13

이 레슨은 [갈등하는 번역 7. 말은 진정한 의미가 아닐 수 있다: 문법범주와 어휘범주 / 8. 문화와 사고방식의 차이: 문법의 기초]에서 다루는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전적으로 문법이란 “글월을 꾸미는 법칙”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언어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문법’이라는 것을 얼마나 고려하는지 생각해본다면,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히 선택된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문화간 커뮤니케이션을 성공적으로 중재하기 위해서는 문법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어떻게 작용하는지, 왜 필요한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그래야만 언어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진정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으며, 문법체계가 전혀 다른 언어로 그 메시지를 최대한 재현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너무 뻔한 이야기 같지만, 언어는 인간의 경험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잠깐, 다시 말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은 ‘경험’이고 언어는 ‘수단’입니다. 물론 여기서 경험이란, 실제 눈 앞에 벌어진 사태는 물론 관념, 감정, 의도 같은 것이 모두 포함됩니다. 이렇게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이자 목적을 ‘메시지message’라고 합니다.

메시지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수단을 활용해야 합니다. 메시지를 ‘음식’에 비유한다면 언어는 ‘그릇’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은 음식이지 그릇이 아닙니다.

문화마다 먹는 음식이 다릅니다. 왜 다를까요? 그 문화가 처한 자연환경에 따라 필요한 영양소가 다르고, 또 그곳에서 채집할 수 있는 음식재료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음식을 수천년 먹어오면서 사람들의 식성이나 체질이나 모습은 달라집니다. 예컨대 유럽인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우유지방을 잘 소화시킵니다. 추운 지방 사람들은 더운 지방 사람들보다 알코올 분해능력이 뛰어납니다. 이러한 특성은 오랜 시간 지속된 음식에 길들여진 결과입니다.

마찬가지로 문화마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다릅니다. 그 문화가 처한 자연환경, 풍습, 사회체제 등에 따라 소통해야 할 ‘의미’도 달라집니다. 어떤 ‘의미’를 소통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그 의미가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한국문화에서는 말을 하든 글을 쓰든, 반드시 상대방과 자신의 관계서열을 ‘소통’해야 합니다(=높임말).

음식이 다르니 그것을 효과적으로 담을 수 있는 그릇도 다르게 발전합니다. 유럽에는 넓적한 접시가 발전한 반면 한국에서는 사발이 발전했죠. 또 유럽에서는 포크와 나이프가 일상적인 식기지만 한국에서는 숟가락과 젓가락이 일상적인 식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따라 문법도 다르게 발전합니다. 그 문화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미를 가장 효과적으로 담을 수 있는 문법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문법은 그릇과 같습니다. 안에 담기는 메시지가 조금씩 달라지더라도 그릇은 바뀌지 않습니다. 무조건 그 그릇 안에 담아야 합니다. 문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든 무조건 그 문법 안에 담아 전달해야 합니다. 예컨대 한국어에서 높임/낮춤을 나타내는 의미는 반드시 선택되어야 합니다.(=높임’법’)

식탁 위에서 음식과 그릇을 구분할 수 있듯이, 우리는 이제 말에서도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선택된 요소(어휘요소lexical element)와 문법을 구성하기 위해 선택된 요소(문법요소grammatical element)를 구분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 두 요소는 음식과 그릇처럼 완벽하게 분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번역가라면 그것이 어휘요소에 가까운지 문법요소에 가까운지 판단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판단을 하지 못하면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Are you a student?”

예컨대 이 문장의 항목들이 제각각 문법범주에 속하는지 어휘범주에 속하는지 구분해볼까요?

먼저 ‘Are you’는 말을 하려면 주어+동사(의문문의 경우 동사+주어)를 반드시 앞세워야 한다는 문법적인 요구를 준수하기 위해 선택된 것입니다. ‘are’는 과거-현재-미래 중 하나를 의무적으로 선택한 결과이며 ‘you’ 도 ‘인칭대명사’ 중 하나를 선택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단수를 표시하는 ‘a’ 역시 철저하게 문법적인 요구에 의해 선택된 것이죠(이 경우 ‘you’가 한 사람을 지칭한다는 것을 화자와 청자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단수’ 표시는 아무런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문법적 요구에 따라 의무적으로 선택된 ‘문법요소’들입니다.

반면 ‘student’는 화자가 자유롭게, 의도적으로 선택한 항목입니다. (예컨대 “Are you a teacher?/Are you a liar?” 등이라고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항목을 ‘어휘요소’라고 합니다. (물론 더 세세하게 따진다면 ‘you’도 어휘적인 요소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장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외국어 학습과정에서는 대개 위 문장을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당신은 학생이세요?”

이 번역은 정확한 번역일까요? 각각의 항목이 문법항목에 속하는지 어휘항목에 속하는지 따져보면 원문과 의미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어가 다르다는 말은 곧, 문법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릇이 다르면 그 안에 효과적으로 담을 수 있는 음식의 종류가 달라지듯이 문법이 다르면 그 안에 효과적으로 담을 수 있는 의미의 종류도 달라집니다. 어떤 언어에서는 반드시 채워야 하는 의미가 어떤 언어에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경우도 있고, 같은 의미라도 다른 형태로 담아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번역이란, 이 그릇에 담긴 메시지를 저 그릇으로 최대한 온전하게 옮기는 작업입니다. 하지만 출발언어(그릇1)에 담겨 있던 메시지를 도착언어(그릇2)에 담기 위해서는 메시지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대개의 경우 번역의 목적이 ‘메시지를 보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릇2에 맞지 않는 의미는 버려야 할 때도 있고 그릇1에 없던 의미를 채워 넣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By |2017-02-15T13:23:37+00:002016년 4월 6일|Categories: 갈등하는 번역, 온라인 번역레슨|0 Comments

About the Author:

번역가. 영국 버밍엄대학 대학원에서 번역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출판기획, 편집, 저술 등 활동을 하면서 40여 권의 책을 번역하였다. 출판번역가를 양성하기 위한 번역강좌를 하고 있으며, 기능주의 번역이론을 바탕으로 번역훈련방법을 설명하는 [갈등하는 번역]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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