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정보구조

갈등하는 번역 온라인레슨 18

이 레슨은 [갈등하는 번역 19. 스타는 맨 마지막 무대에: 정보구조와 엔드포커스/ 20. 글쓰기는 대화하기: 대화의 원리에서 찾는 정보성/ 26. 혼돈 속에서 탄생한 질서: 한국어의 기둥 ‘~은/는’]에서 다루는 내용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말을 할 때 독자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려하여 정보를 하나씩 제시합니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저자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저자와 독자가 협력한 결과물이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쉬운 예를 들자면,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하고 싶어 친구를 만나자고 했을 때 만나자마자 ‘돈 좀 빌려줘’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돈 좀 빌려줘’라는 말은 상대방 입장에서 너무나 ‘새로운 – 그리고 충격적일 수 있는! – 정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나와 상대방이 모두 알고 있는 정보로 대화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날씨’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합니다.)

여기서 ‘돈 좀 빌려줘.’라는 말은 신정보라고 하며 ‘요즘 날씨가 참 덥네.’는 구정보라고 합니다.

당연히 모든 문장은 구정보로 시작하여 신정보로 끝납니다. 어떠한 커뮤니케이션이든 이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온라인레슨 16에서 보았던 예문을 정보구조로 분석해보겠습니다.

Original Version

주제구조에서 분석한 결과와 같습니다. 하지만 정보구조 측면에서 항목을 판단할 경우 세 번째 문장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정보로 제시한 항목이 전혀 구정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문장에서 구정보(독자가 이미 알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는 정보)를 찾는다면 문장 후반부에 나오는 ‘iPhone에 관한 더 많은 기능’이 될 것입니다. 이 항목과 관련된 내용이 2번 문장에서 언급되었기 때문에 (‘iPhon을 설정하고 키 기능을 사용하는 방법’) 독자들은 이것을 충분히 구정보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 전화하는 것’은 신정보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 절의 등장이 뜬금없다고 생각할 것이고, 따라서 한 번 읽고서 이해하기 힘듭니다. 전체 문장을 읽고나서 의미를 새겨보면서 ‘정보구조를 정리하고 나면’ 그제서야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정보구조를 고려하여 글을 수정하면 다음과 같아집니다.

Revised Version

이처럼 메시지를 정보구조 단위로 조직한다는 것은 글 쓰는 사람이 자신의 글을 읽을 사람의 인지적 상태를 세심하게 배려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글을 잘 쓰는 핵심기술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구정보는 맥락으로 결정됩니다. 글의 맨처음부분이든, 중간부분이든, 끝부분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위 예문은 아이폰 박스를 개봉한 사람들이 읽는 글이니 ‘iPhone’은 구정보임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이 빠른 시작설명서’는 독자가 들고 있는 매뉴얼 종이를 가리키니 구정보임에 틀림없습니다. ‘iPhone의 기능’은 2번 문장에서 신정보로 제시되었기 때문에 3번 문장에서 구정보로 제시해도 독자들은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물론 맥락만으로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항목이기도 합니다).

정보구조가 낯선 개념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릴적부터 습득해온 자연스러운 정보처리방식입니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infoseq

쉽게 읽히는 글이란 쉬운 어휘를 쓴 글이 아니라, 정보구조가 위와 같이 잘 짜인 글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쉬운 단어와 짧은 문장으로 쓸 수 있는 것은 초등학생 일기밖에 없습니다!)

이쯤에서 앞에서 설명한 주제구조와 정보구조가 햇갈리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더 많은 예문을 활용하여 공부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주제구조와 정보구조를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만으로도 번역의 질은 크게 달라집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주제구조와 정보구조라는 개념을 모르기 때문에 그 차이를 말로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글을 오래 다뤄본 사람들은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어색함을 감지하고 직관적으로 수정합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번역보다는 이 번역이 훨씬 매끄러운데.”)

물론 주제구조와 정보구조라는 개념은 영어를 기반으로 정립된 것이기 때문에 한국어에 곧바로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먼저 말할 것인가?’ ‘무엇을 강조하고자 하는가?’하는 것은 어떤 언어든, 화자가 말을 할 때 고려하는 요소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 메커니즘은 한국어에도 분명히 작동하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잠깐! 수정된 글의 두 번째 문장에서 ‘~은/는’이 등장했다는 것을 눈치채셨나요? (이 빠른 시작 설명서) 또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 사과, 사과 맛있어…’에서 ‘~은/는’이 등장한다는 것을 눈치채셨나요? 이처럼 한국어의 정보구조는 ‘~은/는’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은/는’을 붙이는 것을 어려워하는데,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국어에서 정보구조(화제와 초점)가 어떻게 구현되는지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번역가 지망생들을 가르치면서 깨달은 것은 ‘~은/는’만 잘 붙여도 번역문의 질이 급격히 상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진행하는 번역코스에서는 번역문에서 topicalized item(‘~은/는’을 붙인 항목)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수정하는 훈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By |2017-02-15T13:23:36+00:002016년 5월 17일|Categories: 갈등하는 번역, 온라인 번역레슨|0 Comments

About the Author:

번역가. 영국 버밍엄대학 대학원에서 번역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출판기획, 편집, 저술 등 활동을 하면서 40여 권의 책을 번역하였다. 출판번역가를 양성하기 위한 번역강좌를 하고 있으며, 기능주의 번역이론을 바탕으로 번역훈련방법을 설명하는 [갈등하는 번역]을 썼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