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중개인: 서평가, 번역가, 편집자

다음 내용은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고전그리스시대의 부활을 꿈꾸는 엘리트주의자로서 카우푸만은 서평과 번역과 편집에 대하여 상당히 엄격한 가치와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의 주장을 완벽하게 현실에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오늘날 인문학 독자들에게, 특히 해당분야의 종사자들에게 고민해볼 만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소개합니다.

서평가 Book Reviewer

서평은 일단 독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듯한 책에는 나오지 않는다. 반면, 뉴스거리가 된 책에는 다양한 서평이 나온다. 또한 서평 자체가 마케팅의 수단으로 작성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평을 신뢰하지 않는다. 특히 인문학 독자라면 서평을 더더욱 까다롭게 취사선택한다.

오늘날 서평을 생산해내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1. 서평만으로 독자들에게 직접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전문서평가들 (극소수)
  2. 자신의 연구분야에 대한 식견을 드러내거나 대중적 유행을 비판하기 위해 서평을 쓰는 학자/교수들 (서평은 학문업적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서평을 거의 쓰지 않는다)
  3. 자신의 지적수준을 과시할 목적으로 서평을 쓰는 (대개 성공하지 못한) 저자들
  4. 사업적인 목적으로 또는 수익의 목적으로 (출판사에서 보상을 받고) 서평을 쓰는 사람들
  5. 자신이 산 책, 읽은 책에 대해 블로그, 소셜네트워크, 온라인서점에 짧은 글을 쓰는 독자들

서평은 정치다

그렇다면 서평은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예컨대 독자들에게 ‘지속가능한 작품’을 선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존재 의미가 있을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러한 작품을 선별하고 비평하는 작업은 매우 어렵다. ‘지속가능성’을 최우선 선정기준으로 삼는 노벨문학상도 톨스토이, 입센, 릴케, 프로이트, 카프카를 알아보지 못했다.

번역가 Translator

인문학의 중개인으로서 번역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사회적 기능을 염두에 두는 번역가라면 자신이 하는 일의 목적이 무엇인지 늘 자문해야 한다. 예컨대 출판사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기획한 읽기 쉬운 책을 출간한다면 출판사의 목적에 부합하기만 하면 되겠지만 학문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인문서라면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학문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인문서의 번역

  • 인문고전을 번역할 때는 학생들이 원작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기초적인 자료가 될 수 있도록 기획해야 한다. 저자의 어조/문체/의미 등을 포착해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 현대적인 어법에 맞게 새롭게 번역해내는 것은 저자/독자를 배신하는 행위이다. 소포클레스는 소포클레스답게, 릴케는 릴케답게 옮겨야 한다.
  • 고전을 무조건 현대적 어법으로 바꿔 번역하는 것은 즐거움/흥미는 높여줄 수 있지만 식별력/이해력은 결핍시킬 수 있다. 18세기 악기로 연주한 모차르트를 보고 들어야 하며, 당시 무대연출과 연기방식을 그대로 적용한 그리스 시대의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봐야 진정한 저자의 목소리를 경험할 수 있듯이, 번역도 그러한 원작 그대로의 목소리가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모험심과 탐구심을 자극할 것이고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촉발할 것이다.
  • 번역과정에서는 상당한 의미손실과 변형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주석이나 해설이 반드시 표시되어야 한다.

편집자 Editor

인문서를 출판하는 편집의 역할은 한 마디로 ‘저자의 목소리에 독자가 좀더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업’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모든 저작물이 저자의 목소리를 똑같이 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논문집, 서간문, 강연노트 등을 똑같은 비중으로 펴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떤 책을 만들든 그것이 기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그러한 목적의식과 판단 없이 모든 글을 출간하는 것은 ‘쓰레기’까지 책으로 내는 꼴이 될 수 있다. 저자의 모든 글을 다 출간하는 것은 오히려 저자의 목소리를 조잡하고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훌륭한 편집이라면 저자의 목소리를 독자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서문이나 해설을 넣어주고, 참고문헌, 독자들이 놓칠 수 있는 암시를 설명하는 각주등을 첨가해주어야 한다.

번역자나 편집자나 출판사에게 이 책을 왜 만들었는지 물으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 일을 통해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자구를 따지는 꼼꼼한 학자나 번역자나 편집자들은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다.

진리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이다.

하지만 정답은 따로 있다.

특별히 아름답거나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간과할 수 없는 어떤 핵심을 말하는 작품―을 다른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다음과 같다.

번역자와 편집자(출판사)는 어떤 책을 출간하는 목적을 독자에게 분명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서평가는 그러한 목적이 그 결과물에 충실히 반영되고 있는지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번역, 편집, 서평은 한결같이 작가의 정신, 텍스트 이면에 존재하는 개인의 목소리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을 해야 한다.

By | 2017-09-06T15:31:18+00:00 2017년 9월 6일|Categories: 갈등하는 번역|0 Comments

About the Author:

번역가. 영국 버밍엄대학 대학원에서 번역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출판기획, 편집, 저술 등 활동을 하면서 40여 권의 책을 번역하였다. 출판번역가를 양성하기 위한 번역강좌를 하고 있으며, 기능주의 번역이론을 바탕으로 번역훈련방법을 설명하는 [갈등하는 번역]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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