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트 쇼팽

Kate Chopin

케이트 쇼팽은 1850년 2월 8일 미주리 세인트루이스에서 캐서린 오플레어티Katherine O’Flaherty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토마스 오플레어티Thomas O’Flaherty는 아일랜드 골웨이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어머니 엘리자 패리스Eliza Faris는 세인트루이스의 프랑스계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그녀의 외할머니, 아떼나이즈 사를빌Athénaïse Charleville은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후손이었다. 모계의 조상들은 앨라배마 도핀아일랜드에 최초로 정착한 유럽 이주민이었다. 그녀는 다섯 남매 중 세번째로 태어났지만 자매들은 유아기에 모두 죽었고, (아버지가 첫번째 결혼에서 낳은) 남자형제들은 20대 초반에 모두 죽었다. 결국 그녀는 남매들 중에서 25살을 넘겨 생존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5살 때인 1855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쇼팽은 어머니, 할머니, 증조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녀는 또한 동화,시, 종교적 우화는 물론, 고전소설과 현대소설의 열렬한 독자가 되었다.

1870년, 20살이 되던 해 그녀는 오스카 쇼팽Oscar Chopin과 결혼을 한 뒤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에 정착했다. 28살이 될 때까지 쇼팽은 모두 여섯 아이를 낳았다. 1879년, 오스카 쇼팽의 면화중개사업이 실패한 뒤, 가족 모두 내처티시 남부 클라우티어빌로 이주하여 여러 개의 작은 농장 및 잡화점을 관리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들은 지역사회에 활발하게 참여하였고, 이곳 생활은 미래의 작품소재가 되었다. 특히, 크레올 문화는 이곳에서 습득한 것이다. 그들이 살던 집은 20세기 후반 역사적 유물로 지정되어 ‘바이유 민속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었으나, 2008년 10월 1일, 화재로 인해 전소되었다.

1882년 남편 오스카 쇼팽이 사망한 뒤, 케이트는 빚 12,000달러(2009년 물가로 치면 25만 달러)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에밀리 토스Emily Toth의 기록에 따르면, “잠시 동안 미망인 케이트는 남편의 사업을 운영하면서 주변남자들과 쉬지않고 바람을 피웠다. (심지어 유부남 농부와 밀회를 즐기기도 했다.)”

쇼팽은 남편이 물려주고 간 농장과 잡화상을 계속 이어나가려고 했지만, 결국 2년만에 모든 사업을 팔고 루이지애나를 떠난다. 남편이 죽은 뒤 그녀의 어머니가 딸에게 다시 세인트루이스로 돌아오라고 간청했기 때문이다. 세인트루이스로 돌아간 뒤 경제적인 고민은 사라졌고 아이들도 안정을 되 찾았다. 하지만 그 다음 해, 쇼팽의 어머니도 세상을 뜬다.

남편과 어머니 모두 세상을 떠난 뒤 쇼팽은 우울증을 앓기 시작한다. 그녀의 담당 산부인과 의사이자 가족친구인 프레드릭 콜벤하이어Frederick Kolbenheyer는 쇼팽에게 글을 쓰는 것이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가는 힘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글쓰기는 케이트의 넘치는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요소득원이 될 수 있었다.

1892년부터 케이트 쇼팽은 여러 잡지에 어른도 읽을 수 있고 아이들도 읽을 수 있는 짧은 동화들과, 단편소설, 칼럼, 번역등을 발표한다. 《St. Louis Post-Dispatcht》, 《Atlantic Monthlyt》, 《Voguet》, 《The Centuryt》, 《The Youth’s Companiont》 등 여러 잡지에 글이 실리면서 그녀는 작가로서 크게 성공한다. 하지만 쇼팽은 남부지역의 색깔이 두드러진 작가로만 인식되었고, 따라서 문학적인 관점에서 평가는 생략되었다.

1899년 쇼팽은 두 번째 소설이자 이후 그녀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각성 The Awakeningt》을 출판한다. 억압적인 사회의 굴레에 갇힌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하지만 도덕적 관점뿐만 아니라 문학적 관점에서도 비판을 받는다. 이 작품은 곧 절판되고 말았으나, 수십년이 지난 뒤 비평가들에게 발굴되어 문학성을 다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의 중요한 초기작품으로 재평가되었다.

1900년, 그녀는 〈뉴올리언스에서 온 신사The Gentleman from New Orleans〉를 발표했고, 같은 해 《마르퀴스 후즈후Marquis Who’s Who》 1판에 등재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원고료만으로는 생활비를 충당하기는 부족했으며, 루이지애나와 세인트루이스에 투자한 곳에서 나오는 배당금에 의존해 생계를 이어나갔다.

1904년 8월 20일 세인트루이스 세계박람회를 관람하던 중 쇼팽은 뇌출혈로 쓰러졌고, 이틀 후 사망했다. 54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그녀는 세인트루이스 캘버리공동묘지에 묻혔다.

클라우티어빌의 케이트 쇼팽 저택

작품의 테마

케이트 쇼팽은 전생애에 걸쳐 다양한 생활양식을 경험했다. 이러한 경험은 19세기 후반 미국사회를 분석할 수 있는 통찰과 이해의 밑바탕이 되었다. 아일랜드계와 프랑스계 혈통을 이어받은 집안에서 태어나 여자들의 손에 양육되었고, 결혼을 한 뒤 루이지애나로 이주한 뒤에는 케이준문화와 크리올문화를 경험하였다. (그녀의 작품 속 이야기와 배경은 대부분 루이지애나에서 경험한 것들이다.) 이러한 모든 경험은 여자를 결핍과 욕구를 지닌 개인으로 묘사하는 평범하지 않은 시선 속에 녹아들었다. 쇼팽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의 열렬한 팬이었고, 그의 문체에 영향을 받았다.

…나는 모파상의 작품을 읽고 탄복했다.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삶이었다. 거기에서는 내가 꿈꾸었던, 어렴풋하면서도 생각해낼 수 없는 방식으로 플롯과 오래된 낡은 매커니즘과 전개기술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그는 전통과 권위를 벗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세계로 들어가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눈으로 삶을 바라본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Le Marquand, Jane. “Kate Chopin as Feminist: Subverting the French Androcentric Influence”. Deep South 2 (1996)

쇼팽은 자신만의 취향에 맞는 글을 쓰기 위해 모파상의 기법과 스타일을 초월했다. 그녀에겐 삶을 인식하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종이 위에 쏟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녀 주요 관심사는 19세기 후반 미국 남부에 살던 여성들의 삶과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모습이었다. 예컨대 〈한 시간 이야기〉에서 말라드 부인은 남편이 사망한 소식을 듣고 홀로 사색에 잠기는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자신 앞에 놓인 혼자 살아가야 하는 시간을 걱정보다는 오히려 전혀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누워 있는 시신의 잘 포개진 부드럽고 다정한 손을 보면 또 울음이 터질 것은 분명했다. 늘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던 얼굴 역시 아무 표정 없이 잿빛으로 굳어버린 모습을 보면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쓰디쓴 순간을 넘어서면 자신만의 온전한 시간이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두 팔을 벌려 그 시간을 맞이했다.

Chopin, Kate. 《The Story of an Hour》

19세기 중후반 작가들은 대부분 쇼팽처럼 이러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대담하지 못했다. 그녀의 손자 데이비드 쇼팽은 이렇게 말한다.

케이트 쇼팽은 페미니스트도,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성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인 여성이었죠. 여성이 강해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Kate Chopin: A Re-Awakening. “Interview: Elizabeth Fox-Genovese, Emory University”. 14 March 2008

케이트 쇼팽은 그녀가 경험한 삶과 사회의 맥락을 속에서 살아가던 개인들을 연민했다.

케이트 쇼팽의 작품은 곧, 그녀 자신의 이야기이자, 그녀가 살아간 시대적 공간적 배경의 기록물이다. 그녀가 살던 때는 여전히 노예제 폐지운동이 계속되고 있었고, 또한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이 도래하던 시기였다. 물론 그녀의 사상과 묘사는 직접적인 단어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그녀의 작품을 관통한다.

쇼팽은 자신의 주변상황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말을 주의깊게 관찰했다. 많은 지식인들이 쇼팽의 작품을 우연히 여자로 태어난 한 개인의 일상적인 감상이라고 인식했지만, 제인 르 마퀀드Jane Le Marquand은 쇼팽의 글을 새로운 페미니스트의 탄생이라고 보았다. 마퀀드는 이렇게 말한다.

쇼팽은 타자인, 여성에게 개인적인 정체성, 자기에 대한 감각을 부여함으로써 가부장제를 훼손한다. 그녀의 작품은 이러한 여성의 깨달음을 기록한 것이다. 그녀의 삶의 ‘공식적인’ 모습은 주변의 남자들에 의해 구축되었지만, 그것은 그 여자가 말하는 이야기를 통해 의심받고 전복된다.

Le Marquand, Jane. “Kate Chopin as Feminist: Subverting the French Androcentric Influence”. Deep South 2 (1996)
1877년 뉴올리언스에서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

쇼팽은 여성의 힘을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을 자신만의 문학적 창작능력을 활용하여 표현했다.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의미있게 전달하기 위해 현실을 과장하는 논픽션적 요소가 필요했을 것이다.

〈데지레의 아기〉는 노예제도와 농장생활의 풍습이 그대로 남아있던 루이지애나에서 살면서 경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백인인 사람이 알고보니 혼혈이었다는 이야기는 사실 전혀 새로운 소재가 아니었다.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은 남부지방에서는 흔한 현상이었다. 또한 이 소설에서 묘사하는 인종차별풍습은 19세기 미국에서 매우 보편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서 아르망이 자신의 자녀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그 당시 미국인들은 이러한 불편한 현실을 대면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 이런 현실을 언급하고 묘사하는 것을 꺼려하고 모른척했지만, 케이트 쇼팽만이 인종주의의 어두운 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위대한 소설이란 “윤리적, 관습적 기준이 가리고 있는 미묘하고 복잡하고 진실한 의미를 발가벗겨 인간의 실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Foy, R.R.. “Chopin’s Desiree’s Baby”, 222–224.)

HBO의 드라마 《트레메이Treme》 첫 번째 시즌 9번째 에피소드에서 크레이튼(John Goodman 분)은 신입생들에게 케이트 쇼팽의 《각성》을 읽어오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만의 시간을 가져보도록. 언어 자체에 주의를 기울여 보고, 그 속에 담긴 관념을 생각해보고. 이야기가 언제 시작하고 끝날까 그런 건 생각하지 말고. 플롯에만 의존하는 오락물과는 달리,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는 시작도 끝도 없으니까. 알았죠?

루이지애나 공공 방송에서는 케이트 쇼팽의 일대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케이트 쇼팽 – 새로운 각성 Kate Chopin: A Reawakening〉을 방영하기도 했다.

1990년 케이트 쇼팽은 세인트루이스 유명인거리St. Louis Walk of Fame에 기념되었다. 2012년 미주리 세인트루이스 작가코너에 청동흉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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