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오역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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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문장은 잘못된 것이 없는데, 왠지 모르게 이해하기 어렵다.

많은 번역서들을 읽고 독자들이 보이는 흔한 반응 중 하나입니다. 이런 번역서를 분석해보면 대개 “텍스트차원의 오역”이 문제인 경우가 많습니다. 올바른 한국어 표현가이드와 같은 미시적인 요소들도 중요하지만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완결된 텍스트성(textuality)입니다.

아무리 원문을 정확하게 번역했다고 하더라도 cohesion(표층결속성)과 coherence(심층결속성) 같은 텍스트그물망에 문제가 있는 글은 읽기도 어렵고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메시지의 포커스와 정보의 비중을 진단/파악하고 각각의 메시지(절)를 적절하고 효율적으로 배치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문제는 단순한 ‘취향’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이기 때문에 전문번역가라면 반드시 통달하고 있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술입니다.

텍스트구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제 번역사례를 통해 설명해보겠습니다. 아래 글은 2008년 12월 15일 “The New Yorker”에 실린 Risk Factors라는 논평을 번역한 글 중 첫 문단입니다. (원문은 보지 않아도 됩니다.)

인도 뭄바이에서 힘없는 양민이 무장괴한에게 희생된 사건이 있은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미국의 한 위원회는 ‘대량살상무기 및 테러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한다. “위기의 세계”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이념과 당파를 초월하여 활동하는 이 위원회의 양심의 산물이다. 위원회에서 종이책자로 제작하여 직접 판매에 나선 점으로 미루어 이 보고서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보고서에서 제시하는 균형잡힌 진단과 권고를 읽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문제에는, 심지어 2013년 말경에는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대량살상무기가 쥐어질 것이라는 경악스러운 진단에도, 상식적인 해법이 있음을 새삼 깨닫고 잠시나마 안도하게 된다. 장별로 생물학적 무기와 핵무기의 위험성을 다루고 있는 이 보고서에서 눈에 띠는 것은 ‘피키스탄’에 대해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파키스탄 자체가 대량살상무기임을 암시하는 인상을 준다.

글의 전개가 매우 혼란스러워 이 글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쉽게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습니다. 물론 상당한 집중(정신노동)을 한다면 이해할 수 없는 글은 아닙니다. 대개의 번역서들이 이런 문장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책이 어렵거나 자신의 이해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글은 명백한 오역입니다 – 보이지 않는 오역, 텍스트 차원의 오역입니다. 왜 그런지 살펴보겠습니다.

번역문을 정리해보면 위원회에 대한 소개와 보고서에 대한 소개가 주요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절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 표시해보겠습니다.

인도 뭄바이에서 힘없는 양민이 무장괴한에게 희생된 사건이 있은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미국의 한 위원회는 ‘대량살상무기 및 테러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한다. “위기의 세계”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이념과 당파를 초월하여 활동하는 이 위원회의 양심의 산물이다. 위원회에서 종이책자로 제작하여 직접 판매에 나선 점으로 미루어 이 보고서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보고서에서 제시하는 균형잡힌 진단과 권고를 읽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문제에는, 심지어 2013년 말경에는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대량살상무기가 쥐어질 것이라는 경악스러운 진단에도, 상식적인 해법이 있음을 새삼 깨닫고 잠시나마 안도하게 된다. 장별로 생물학적 무기와 핵무기의 위험성을 다루고 있는 이 보고서에서 눈에 띠는 것은 ‘피키스탄’에 대해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파키스탄 자체가 대량살상무기임을 암시하는 인상을 준다.

색깔이 참 화려하죠? 독자는 선형구조linear structure로 정보를 습득하기 때문에 앞에서 읽은 정보를 정리하여 다시 그 다음 정보를 해독하기 위한 바탕지식으로 활용합니다. 위 글은 위원회 이야기를 찔금, 다시 보고서 이야기를 찔금, 다시 위원회 이야기 찔금, 보고서 이야기 찔금… 별로 복잡하지도 않은 정보를 아주 복잡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은 볼 것도 없이 10중 8/9 오역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정신없이 글을 쓰는 사람이 칼럼을 쓰거나 책을 낼 일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원문을 통해 확인해겠습니다.

A few days after well-armed men mowed down scores of helpless people in Mumbai, an American commission released a report on terrorism and weapons of mass destruction. “World at Risk” is one of those conscientious, bipartisan efforts, its importance signaled by publication as a trade paperback, whose sober findings and pragmatic recommendations momentarily give you the sense that every problem—even one as alarming as the likelihood that “a weapon of mass destruction will be used in a terrorist attack somewhere in the world by the end of 2013”—has a common-sense solution. The report includes chapters on biological and nuclear risks, and one titled “Pakistan,” which would seem to suggest that the nation itself is a kind of W.M.D.

원문의 정보흐름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먼저 위원회를 제시하고 그 이후에는 모두 보고서에 대한 언급입니다. 정보의 흐름이 단순할수록 독자가 부담해야 하는 정보부하(information load)가 줄어들기 때문에 이해하기 쉬운 글이 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만큼 글쓰는 사람이 고생해야 합니다. 문장구사능력이 뛰어나야 합니다.)

이 번역문을 개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번역문에서 각각 항목에 해당하는 정보를 정리해봅시다.

위원회보고서
미국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념과 당파를 초월하여 활동한다
종이책자로 제작하여 직접 판매에 나섰다
‘대량살상무기 및 테러에 관한 보고서’
“위기의 세계”라는 제목의
위원회의 양심의 산물이다
중요성(중요하다)

이 정보들을 최대한 복잡하지 않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인도 뭄바이에서 힘없는 양민이 무장괴한에게 희생된 사건이 있은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이념과 당파를 초월하여 활동하는 미국의 한 위원회는 ‘대량살상무기 및 테러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한다. 종이책자로 제작하여 직접 판매에 나설 정도로 “위기의 세계”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이 위원회의 양심의 결실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저작이다.

텍스트 차원 이외의 번역자의 선택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정보구조만 약간 바꿨습니다. 원래 번역문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정보전개가 웬지모르게 불안해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영어문화에서는 무생물항목을 theme으로 삼아 서술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바람직합니다. 무생물을 주제로 삼아 진술을 하면 아무래도 서술의 객관성이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누가 무엇을 했다’고 서술하는 것보다 ‘무엇은 무엇이다’라고 서술하는 것이 훨씬 객관적으로 보입니다. (학술논문과 저널에서 ‘행위자를 가리기 위해’ 수동태를 남발하는 장르문법이 발전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어에서는 이러한 수사법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무생물이 주제가 되는 진술은 왠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이 부분에서 번역가는 과감한 문화적 도약을 해야 합니다. 한국어에서 익숙한 topic(=행위자)을 잡아 글의 진술관점을 전환해보겠습니다.

인도 뭄바이에서 힘없는 양민이 무장괴한에게 희생된 사건이 있은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미국의 한 위원회는 “위기의 세계”라는 보고서를 발표한다. 이념과 당파를 초월하여 활동하는 이 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책자로 제작하여 직접 판매에 나설 정도로 위원회의 양심을 걸고 오랜 기간에 걸쳐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자, 이제 번역문은 원문의 정보구조와 매우 흡사해졌습니다. 물론 이 번역은 오역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습니다. 텍스트 차원(정보구조)에서는 원문의 구조를 그대로 복원해냈습니다. (따라서 읽기 쉬운 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장의 주제(관점)를 바꿈으로써 원문보다는 주관적인 진술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희생하고 무엇을 살릴 것인가 결정하는 것은 번역자의 선택입니다. 어떤 선택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는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고, 번역을 수행하는 직업적/철학적 신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해’를 어렵게하는 텍스트는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기능도 수행하지 못할 위험이 큽니다. 저는 힘들게 쓴(번역한) 글이 어렵다는 이유로 읽히지 않는 것은, 그 책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정보구조가 글의 구성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고친다고 해도 아직 많은 문제들이 눈에 띕니다. 예컨대 원문의 those라는 대명사가 과연 위원회를 가리키는가 하는 것입니다(수number가 다르니 those는 위원회를 지칭하지는 않겠죠?). 또 어휘선택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정보구조 수준의 문제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니, 단어수준이나 문장수준의 문제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하고 마무리하자면, 이 번역의 scene setting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위기의 세계”에서 다루는 주제는 ‘사람을 죽이는’ 무기입니다. 하지만 맨 앞에 나오는 scene setter는 ‘힘없는 양민이 무장괴한에게 희생된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희생된) 사건’이 아니라 ‘죽인 사건’에 대해서 먼저 언급해야 독자들은 ‘대량살상무기’를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일관된 그림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인도 뭄바이에서 무장괴한들이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 발생하고 며칠 뒤, 미국의 한 위원회는 “위기의 세계”라는 보고서를 발표한다. 이념과 당파를 초월하여 활동하는 이 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책자로 제작하여 직접 판매에 나설 정도로 위원회의 양심을 걸고 오랜 기간에 걸쳐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원문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볼까요?

A few days after well-armed men mowed down scores of helpless people in Mumbai,

아니나다를까, 저자가 동사를 ‘죽다’이 아니라 ‘죽이다’를 분명히 선택하고 있지요?

어순(정보의 배치)는 분명히 저자의 선택입니다. 어떤 선택이든 ‘의도’가 반영됩니다. 정보배치는 한국어와 영어의 어순의 차이를 핑계로 무시해도 될만큼 무의미한 선택이 아닙니다. 저자는 독자에게 어떤 효과를 제공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모든 수사적 항목을 선택합니다. 실력있는 번역자라면 그 의도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저자의 의도를 번역자가 100퍼센트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번역자도 번역선택에 – 저자의 의도와 다를 수 있는 – 자신의 의도를 반영할 수 있으며, 또 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텍스트차원의 오역을 발견하고 이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심층적인 독서훈련(과 더불어 글쓰기훈련)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합니다. 머리로 아는 것만으로는 실제 번역작업에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기본적인 텍스트이론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이런 지식을 실제 번역에 적용해 분석하고 개선하고 평가하면서 지속적으로 반복훈련을 통해 몸으로 체화해야 합니다.

글을 건축에 비유한다면 스타일Style은 페인팅이고, cohesion과 coherence와 같은 레토리컬 테크닉(rhetorical technic)은 골조를 세우는 일입니다. 골조가 허술한 글에 아무리 좋은 부사를 선택하고 수동태를 능동태를 바꾼들, 좋은 글이 나올 리 만무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텍스트 차원의 글쓰기/글고치기에 관해 설명하는 글쓰기나 번역에 관한 책이나 강의는 시중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텍스트차원의 글쓰기는 눈에 보이는 ‘표현들’과 달리 쉽게 눈에 띄지도 않기 때문에 이를 발견하고 진단하고 해결하는 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직감적으로 안다고 하더라도 텍스트이론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없으면 그것을 말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컨트라베이스 번역캠프에서 제공하는 번역훈련의 80퍼센트는 바로 이러한 문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20주 동안 계속되는 coherence 지적질에 학생들은 늘 리라이팅(rewriting)과 리-리라이팅(re-rewriting)의 늪에서 고뇌합니다. 하지만 그 늪을 헤치고 나와야만 진정한 번역가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컨트라베이스 번역캠프를 거쳐간 선배번역가들이 입증합니다.

Note: 위에서 검토한 번역문은 제 번역수업을 듣는 학생의 과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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