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개혁요구를 무시하고 수 세기 동안 미적거리던 교황청은 결국 종교개혁이라는 강타를 맞고 비틀거리다 마침내 무릎을 꿇고 만다. 루터가 95조 반박문을 게시한 지 불과 17년 만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독일의 절반과 영국, 덴마크, 스코틀랜드, 스위스에서 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의 영향력을 눌러버린 것이다.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도 불만으로 들끓었다.

1527년 로마대약탈에서 제대로 회복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가톨릭 자체가 사멸할 수 있다는 현실을 깨닫고 마침내 제정신을 차린 교황과 추기경들은 오랜 시간 회피해왔던 교회개혁을 단행한다. 1563년 개최된 트리엔트공의회에서 성직자들의 도덕적 청렴함을 강조하며 교회의 재산과 특권을 남용할 수 있는 성직자의 권한을 폐지한다.
예수회의 교회개혁과 반-종교개혁운동
기울어가던 가톨릭의 부흥운동을 이끈 핵심인물은 바로 스페인의 군사장교였던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다. 열정적이고 진지하며 정치적인 수완까지 갖춘 그는 1540년 ‘예수회Society of Jesus’라는 수도회를 창립한다. 예수회는 윗사람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최우선 규율로 삼으며 군사조직처럼 움직였다. 예수회는 우선, 프로테스탄트의 영향력이 강하지 않은 지역을 파고들었다. 예수회 사제들은 아무 장식도 없는 검은 망토처럼 생긴 카속cassock을 입고 다녔는데, 이 의복은 기존의 가톨릭교회에도 영향을 미쳐 카속을 입고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인쇄물을 활용하여 교세를 확장해나가는 것을 보고, 로욜라는 가톨릭도 인쇄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센 불은 맞불로 잡아야 하는 법이다. 이 개혁가는 1000년 동안 이어온 교회의 정책을 뒤집어, 가톨릭신도들에게도 하루빨리 성서를 가르쳐야 한다고 교황을 설득한다.
예수회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유럽의 중심지마다 1류 교수진들을 확보하여 학교와 대학을 세우고 가톨릭신자들에게 무료로 종교교육을 실시한다. (물론 여자는 입학할 수 없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세운 세속적인 대학들과 맞서기 위해 그들이 가르치는 교과목도 모두 개설했다.
또한 프로테스탄트와 맞서 논쟁할 때 반드시 필요한 지식으로,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들을 가르쳤다. 이 과정에서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가톨릭의 강력한 한 축을 담당했던 신비주의전통은 상당수 배제되었다. 루터나 칼뱅처럼 로욜라도 성서의 무오류성을 믿었고, 논리와 문자만으로 믿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테스탄트의 주요지식인이었던 프랜시스 베이컨 역시 예수회에서 설립한 대학의 탁월한 교육프로그램을 보고 부러운 듯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저런 것들을 우리가 가지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Preserved Smith, The Age of Reformation, 666
결국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는 다시 비슷해진다. 실제로 칼뱅은 가톨릭과 자신의 교리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은 그토록 치고받고 싸웠지만 거리를 두고 보면 도대체 왜 싸우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비슷했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
종교개혁 지도자들이 내세운 명분은 ‘성서절대주의’였지만 사실상 종교개혁을 지배한 것은 ‘원죄론’과 ‘구원예정설’이었다. 사실 이는 성서와 무관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서의 정신과도 모순되는 것이었다.
고대그리스에도 ‘운명’이라는 개념이 존재했지만, 그것은 신들의 변덕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었다. 유대교는 개인이 옳은 것과 그른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으며, 야훼의 계시에 따라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힌두교나 불교의 카르마 역시 현세에서 개개인의 선택과 행위가 축적되어 다음 생에 영향을 미친다. 노자의 ‘도’의 세계에서는 예정설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프로테스탄트의 창시자들은 한결같이 추종자들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독려했지만, 프로테스탄트를 떠받치는 토대는 사실 고통스러울 만큼 치밀한 논리구조물, 그림 하나 없이 글자만 빽빽하게 들어차있는 두툼하고 지루한 신학서적이었다.
칼뱅은 ‘프로테스탄트 윤리’라는 이름으로 검소, 겸양, 근면, 자립, 청렴을 강조하는 도덕적 기준을 만들어냈지만, 이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탐구에서 나온 덕목이 아니었다. 1,400년 전 대부분 누가 쓴 것인지도 모를 문자 기록을 의심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믿고 살아가기에 적합한 개인이 되기 위해서 갖춰야할 덕목에 불과했다.
반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서는 기쁨, 사랑, 자비, 웃음, 아름다움과 같은 가치를 눈을 씻고도 찾아 볼 수 없다. 8세기 기사도, 9세기 마리아 신앙, 10세기 신비주의, 11세기 넘치는 호기심, 12세기 열린 마음, 13세기 욕정, 14세기 개인들의 독창성, 15세기 휴머니즘이 있었다면, 16세기에는 비참한 무기력을 설파하는 우울한 교리만이 존재했다.
어쨌든 칼뱅의 비전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마침내 한 손에는 성서를,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맹렬히 싸우다가 전사하겠다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실제로 엄청나게 많은 이들을 죽인다. 인도에서 불교는 힌두교에 대항하여 일어났고, 중국에서 유교는 도교의 영향력을 물리쳤으며, 일본에서 선불교는 신도를 눌렀지만, 이러한 종교혁명 뒤에는 테러 정치가 등장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은 심각한 종교적 발작으로 깊은 몸살을 앓았으며, 이 트라우마는 오늘날 서양 문명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이러한 병적인 유전자는 지금까지 살아남아, 아일랜드 같은 곳에서는 지 금까지도 종교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칼뱅은 ‘프로테스탄트 윤리’라는 이름으로 검소, 겸양, 근면, 자립, 청렴을 강조하는 도덕적 기준을 만들어냈지만, 이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탐구에서 나온 덕목이 아니었다. 1,400년 전 대부분 누가 쓴 것인지도 모를 문자 기록을 의심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믿고 살아가기에 적합한 개인이 되기 위해서 갖춰야할 덕목에 불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