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특파원들의 소름 끼치는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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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위험지역에서 AP특파원들이 수행하는 임무는 ‘시체안치소 관리인’이 하는 일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AP의 한 기자는 피맛이 느껴지는 공기 속에서, 비닐봉지 밖으로 튀어나온 시체조각들을 세다가 갑자기 밀려온 공포에 몸서리친 경험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나, 둘, 셋”… 집중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가면서 셌죠. “하나, 둘, 셋.” 밖으로 소리를 내면서 셌어요. 얼마까지 셌는지는 모르겠어요. 20, 30… “더이상 못 하겠어.” 소리쳤어요. 나 자신이 싫었어요. 그곳에 서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시체를 세고 있는 나 자신을 참을 수 없었어요.

AP Oral History, Faramarzi, 2009, 53-54

이라크전장에서도 AP기자들은 미군의 폭격이 끝나면 곧바로 바그다드 내 병원을 돌아다니며 사상자를 파악했다. 안전상 문제로 인해 밖을 나갈 수 없는 경우에는 비상근 현지인 통신원들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AP가 이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직접 사망자수를 집계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군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피해상황을 거짓으로 공표하기 때문이다.

미군은 우리가 전쟁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키려고 한다고 불평하면서, 우리가 집계한 숫자에 대해 늘 이의를 제기합니다.

Steven Hurst

이 소름끼치는 임무를 AP특파원들이 중시하는 이유는, 다른 언론사들이 AP의 집계를 ‘표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1966년 브라질에서 대홍수가 발생했을 때 사망자 수를 집계하는 통신사는 AP밖에 없었는데, 이때부터 시체를 세는 것은 AP의 주된 임무가 되었다.

시체를 직접 세는 작업은 사망자 수를 확인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처참한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헤딘 무장단체 사이에 발발한 무자비한 전쟁 중, 캐시 개넌은 5살 소녀가 로켓포에 정통으로 맞아 처참하게 죽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아이는 아파트 밖으로 나왔다가 참사를 당하고 말았다. 더 끔찍했던 경험도 있다.

하자라 족 사람이 미친듯이 울음을 터뜨리며 내 발 앞에 뭔가를 던지더군요…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사람의 머릿가죽이었죠. 그리고 나를 끌고가 머릿가죽이 벗겨진 시체들을 보여줬어요. 여자들을 강간한 뒤 머릿가죽을 벗겨 죽인 거예요.

Kathy Gannon
Kathy Gannon and Anja Niedringhaus, an award-winning AP photograper. 2014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선거운동을 취재하다가 테러공격을 받았는데, 개넌은 중상을 입고 니들링하우스는 즉사했다.

폭력으로 희생된 이들의 시신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경험 많은 특파원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경험은 직접적인 위험으로 입는 몸의 상처보다 훨씬 큰 마음의 상처를 남길 수 있다. 특별한 치료방법도 없이 오랜 시간 트라우마와 싸울 수밖에 없다.

AP특파원들은 취재현장에서 아드레날린을 계속 펌프질하면서 거침없이 달린다. 특히 사건을 취재하는 동안에는 비참한 현실이 자신의 감정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취재원을 찾고 기사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기자가 겪는 가장 큰 고통은 바로 이러한 ‘감정의 장벽을 치는 일’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날 무렵, 도나 브라이슨은 폭력현장을 취재하러 나갔다가 동료가 죽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지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현장에서 취재를 계속 이어나갔다.

Donna Bryson, reporting the nation’s first all-race election of South Africa in 1994.

때로는 너무나 치명적이어서, 현장에서는 아예 감지하지 못하는 공포도 있다. 취재를 하는 동안에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공포가 나중에 깊은 상처로 남기도 한다. 테리 앤더슨은 베이루트에서 그런 경험을 했다.

세 살짜리 남자아이가 불에 타 온몸이 까맣게 되어 수술대 위에 죽어있는 걸 봤습니다. 의사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목놓아 울었죠. 수술대 옆에는 젖먹이 쌍둥이 남매를 물에 담가 놓은 양동이가 놓여있었는데, 죽은 아이의 동생이었어요. 물 속에서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죠. 그 참혹한 장면을 보고 나는 기사로 썼죠.

Terry Anderson

병원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점령한 서베이루트에 있었는데, 이스라엘의 분계선에서 몇 백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당시 함께 사무실을 사용하던 BBC특파원 로버트 피스크Robert Fisk는 앤더슨이 현장에서 돌아와 ‘눈물을 쏟으며’ 기사를 타이핑하는 모습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앤더슨이 쓴 592단어로 된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얼굴과 가슴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3살짜리 꼬마 아메드 바이탐을 병원침대에 올려놓고 부드러운 붕대로 묶었다. 의사 아말 사마는 백린탄으로 인해 여전히 연기가 피어나는 상처를 살펴보기 위해 몸을 기울였지만, 그 순간 어린 아이의 심장은 멈췄다… 마른 체구의 소아과의사는 온 힘을 쏟아 아이의 가슴을 강하게 압박하며 규칙적으로 입에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간호사는 정맥주사와 전기충격기를 가져오기 위해 달려나갔다. 목요일 오후, 20분 간 노력을 쏟았음에도 아이는 되살아나지 못했다.

Terry A. Anderson, “One phosphorous shell kills three children, burns 11 relatives,” The Associated Press, July 30, 1982

앤더슨은 나중에 테러리스트들에게 붙잡혀 인질생활을 하는 동안, 이 사건을 취재할 때 느낀 경험을 시로 썼다. 시는 이러한 비극을 아무리 열심히 취재한다고 해도 세상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처절한 절망을 표현한다.

우리가 종이 위에 흘린 눈물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다음 세상에도 또다른 아이와
또 다른 기자가 있을 것이고,
폭력으로 가득찬 세상이라는 욕조에서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일어날 수는 없는 법
단어를 수천 개 늘어놓는다고 해도
그 감정은 깨끗이 정화되지 않는다.

여기 수록된 AP특파원들의 인터뷰는 2012-2014년 실시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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