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신화가 꿈꾸는 세상

농경이 도래한 뒤 5000년 동안 우리 인류는 봄마다 대지에 새로운 생명이 솟아나는 것을 위대한 어머니여신이 사랑하는 아들·연인·남매를 부활시키는 것에 비유해 왔다. 이난나와 두무지, 이시스와 오시리스, 이슈타르와 탐무즈,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 이야기가 모두 이와 연관된 신화들이다. 히에로가모스(신성혼)라는 고대의 가장 성스러운 의식에서도 남자는 인간인 반면, 여자는 여신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부활의 힘을 모두 남신에게 부여한다. 예컨대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5세기 올림포스에서 불, 가족, 어린 아이들을 지키는 여신 헤스티아를 쫓아내고 그 역할을 디오니소스에게 맡긴다. ‘어머니’라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 부활 신화를 창조한다.

젖가슴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여신 아르테미스와 포도알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디오니소스. 디오니소스를 통해 여신의 이미지를 가져오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리스의 여성혐오문학

기원전 8세기, 구전되어 오던 서사시를 문자로 기록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기존에 추앙받던 여성적 가치를 폄훼하고 남성적 가치를 찬양하기 위해 쓰여진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품의 주요소재는 남자의 행위이며,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의식은 남성-죽음이라는 관념이다. 남성적 영웅주의, 기만, 고통, 죽음 전투장면이 생생하게 펼쳐지는 반면 여자는 매우 사소한 역할만 한다.

이는 《일리아스》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스함대가 트로이로 항해할 수 있도록 바람을 불러오기 위해 아가멤논이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가 자신의 딸 폴릭세나를 제물로 받치는 장면으로 끝난다.

또한 트로이목마 역시 성적인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 자신의 ‘문’을 열어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는 트로이는 여자, 은혜로운 선물인 줄 알았던 그리스의 거대하고 딱딱한 목마는 트로이를 파괴하는 ‘강간범’이다.

전쟁에서 포로로 사로잡은 아름다운 여인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싸우는 것부터 시작하여 《일리아스》는 여자와 그들의 생식기를 지배하고자 하는 남자의 욕망에 관한 한편의 서사시라 할 수 있다.

《일리아스》가 쓰여지고 100년 정도 지난 뒤 그리스의 완고한 농부 헤시오도스가 쓴 《신들의 계보Theogony》는 더욱 악의에 찬 여성혐오를 드러낸다. 여기 등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최초의 여자 판도라 이야기다. 프로메테우스가 허락도 없이 인간에게 불을 선사하자 제우스가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서 여자를 만들어 벌을 주었다는 이야기다.

제우스는 판도라를 에피메테우스에게 아내로 준다. 그리고 그에게 세상의 악을 담아 놓은 상자를 맡긴다. 상자에 손대지 말라는 남편의 지시를 어기고 판도라는 상자를 열었고, 온갖 악의 영령들이 세상으로 퍼져나간다. 그날 이후 세상은 대혼란에 휩싸인다.

제우스는 지아비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대가로 판도라와 그녀의 모든 딸들에게 출산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형벌을 내린다. 또한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녀―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모든 여자들―는 아버지의 지배, 그 다음엔 남편의 지배를 받도록 한다.

에덴동산에서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과 마찬가지로 판도라가 명령을 어기고 상자를 연 것은 지혜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가 받은 벌을 보면 이브와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세기와 판도라 이야기의 목적은 똑같다. 여자를 모욕하고, 위대한 어머니의 위상을 훼손하고, 남자가 여자를 지배할 구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왜 이러한 신화를 만들어냈을까? 그 전까지 사회적인 권력의 상당부분을 여자들이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문화적인 인식을 바꾸기 위해 이처럼 창조신화까지 다시 만들어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여자 없는 탄생신화의 등장

여기서 그리스신화는 한발 더 나아가 생명을 출산하는 가장 신비롭고도 고귀한 여성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마저 박탈한다. 그리신화에서 위대한 어머니를 상징하는 세 여신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는 모두 기이하게도 남자의 몸에서 태어난다. 물론 어머니의 손에서 양육된 적도 없다.

The Birth of Venus by Alexandre Cabanel (1863)

크로노스는 자신의 아버지 우라노스의 페니스를 잘라서 바다에 버린다. 우라노스의 피와 정자가 바닷물과 섞였고, 이 혼합물은 바다밑으로 가라앉는데, 여기서 아프로디테가 생성된다. 이 성욕의 여신은 혼기에 찬 처녀의 모습으로 태어난다. 자궁도 없이 남자의 피와 정자만으로 잉태된 것이다.

The Peacock complaining to Hera (Juno) by Gustave Moreau (1881)

크로노스는 아버지를 거세하여 죽인 것에 대한 벌로 자식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신탁이 두려워 크로노스는 자신과 데메테르 사이에서 낳은 아기들을 모두 잡아먹는데, 나중에 제우스가 아버지의 배를 가르고 그동안 삼켰던 자신의 형제들을 구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헤라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남자의 몸속에서 자라 세상에 나온 것이다.

The Birth of Minerva, Rene-Antoine-Houasse (1688)

아테나는 제우스와 메티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우스는 정신, 측정, 질서를 관장하는 메티스의 힘을 탐하여 아내를 통째로 삼켜버리는데, 그녀의 뱃속에는 아테나가 자라고 있었다. 메티스는 죽었지만,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로 자리를 옮겨 계속 자란다. 아테나는 남자의 뇌에서 완전히 성장한 상태로 자라 세상에 나온다.

고대사회에서 위대한 여신의 역할을 축소하고 폄훼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신이 남신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꾸미는 것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구약과 그리스신화는 똑같이 자연의 순리를 뒤집어 출산이 남자의 일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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