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0년대 칼뱅의 위세가 급격하게 뻗어나가자 가톨릭교회는 칼뱅과 그 신도들을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한다. 이들의 박해를 피해 칼뱅은 스위스로 피신하였고, 여기서 제네바의 원로(장로)들에게 신임을 얻는다.

원로들을 등에 업은 칼뱅은 자신의 신정국가 사상을 하나씩 현실속에서 구현해 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너무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칼뱅에 대해 제네바시민들의 불만이 폭주했고, 결국 주민투표를 통해 그들을 쫓아내버린다. 미치광이 원리주의자들이 쫓겨나자 제네바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축배를 터트리며 기뻐한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고 ‘종교개혁’의 불길이 본격적으로 치솟자 제네바의 원로들은 칼뱅을 다시 불러들인다. 시민들의 반발을 고려하여 이전처럼 칼뱅에게 전권을 주지는 않았지만, 칼뱅은 ‘종교적 열정’이라는 명분으로 야금야금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1541년부터 시작된 칼뱅의 ‘하느님의 나라’ 건설사업은 결국 역사상 가장 억압적이고 가혹한 경찰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칼뱅은 가장 먼저 제네바의 원로이자 교회의 장로들에게 시민들의 집을 빠짐없이 방문하여 그들의 신앙, 행실, 사적인 생활을 낱낱이 탐문하고 기록하여 보관하라고 명령한다.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불경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지 늘 감시하고 보고하라고 세뇌한다.
예배는 제네바 시민이라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해야 했다. 예배에 늦는 것도 절대 용납되지 않았다. 한 번만 지각해도 엄한 질책과 추궁을 받아야 했으며, 세 번 이상 지각하면 추방하거나 사형(!)시켰다. 칼뱅이 요구하는 신앙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제네바를 떠나야만 했다.
시민생활에 대한 삼엄한 통제가 계속 강화되면서 신성모독은 물론 춤, 노래(찬송가는 예외), 카드놀이, 여흥, 음주 등이 모두 금지되었으며, 종을 치거나 향을 피우는 행위, 크게 웃거나 떠드는 행동도 모두 금지되었다.
밥을 먹을 때 식탁 위에 올릴 수 있는 접시의 수(불과 몇 개)와 입을 수 있는 옷색깔(황갈색)도 법으로 규정하여 이를 어기면 처벌했다. 도박을 하다 걸리면 사람들이 다니는 길 한복판에 차꼬에 묶어 놓았다.

아이들 이름은 무조건 성서에 나오는 사람 이름으로 지어야 했다. 아들 이름을 ‘아브라함Abraham’으로 짓지 않고 ‘클로드Claud’라고 지었다는 이유로 어떤 부모는 4일 동안 감옥신세를 졌다.
여자들은 더욱 엄격하게 통제했다. 볼이나 입술에 연지를 바르거나, 보석을 치장하거나, 레이스가 달린 옷이나 화려한 색깔의 좋은 옷을 입는 것은 모두 금지되었다. 머리를 너무 많이 올려 묶었다는 이유, 튀는 모자를 썼다는 이유로 감방에 간 여자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사소한 애교에 지나지 않았다.
- 결혼 전 섹스를 한 여자—死刑(대개 물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 간통—死刑
- 신성모독—死刑
- 우상숭배—死刑
- 항문삽입—死刑
- 수간(동물과 섹스)—死刑
- 이단—死刑
- 마술—死刑
낙태는 뭐 고민할 필요도 없었는데, 결혼도 안한 여자가 임신한 것이 들키면 그 자리에서 물에 집어넣어 죽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행위들은 대부분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고문이 일상적으로 자행되었다.

신성제네바에서 가톨릭은 이단이었기 때문에 묵주나 성모상을 지니고 있다가 잡히면, 장로들 앞에 끌려가 재판을 받았다. 악마와 정을 통하고 제네바에 역병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은 여자 14명은 모두 유죄로 확정되어 화형대에 묶어 불태워 죽였다. 심지어 칼뱅의 의붓아들과 며느리도 각각 간통혐의로 고소당했는데, 이들과 정을 통했다고 하는 상대까지 모두 잡아다가 가차없이 사형시켰다.

남자만으로 이루어진 무자비한 재판관들은 강박적일 만큼 꼼꼼하게 재판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을 보면 이토록 엄중한 상황에서도 수많은 사생아들이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아기들은 대부분 태어나자마자 들판에 버려졌다.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한 여자들은 임신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으며, 가끔은 목숨을 걸고 교회 앞 계단에 아기를 놓고 도망가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아이를 낙태시키려고 시도하다가 죽음에 이른 젊은 여자들이 꽤 많았을 여겨진다.
이 하느님 나라의 야만성은 극에 달해, 마침내 부모를 때렸다는 혐의로 아이를 잡아다 목을 자르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언론과 출판도 엄격히 통제했다. 칼뱅을 비판하는 사람은 무조건 사형시켰다. 한번은 칼뱅이 설교할 연설대 앞에, ‘이전의 어떤 교황보다도 칼뱅이 저지른 죄는 훨씬 악랄하다’고 비난하는 게시물을 누군가가 붙여놓았다. 칼뱅은 범인으로 자크 그뤼에 라는 휴머니스트를 지목하고 체포한다. 그뤼에는 혐의사실을 전면 부인했으며, 죄를 입증할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매일 두 차례씩 30일 동안 고문을 했고 마침내 미심쩍은 자백을 받아낸다. 곧바로 사형집행관들은 그를 광장으로 끌고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차꼬에 발목을 묶고 못질한 뒤, 머리를 잘랐다.

칼뱅은 일 중독자였다. 쉬는 날이 거의 없었고 휴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몸이 편하면 악마의 계략에 놀아날 수 있다고 말했다. 미적 감각이나 자연에 대한 관심도 전혀 없었다. 인간의 나약함과 불완전함에 대해 어떠한 연민도 관용도 보이지 않았다. 유머도 허용하지 않았다.
칼뱅은 또한 계급이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다. 어떠한 야망도, 자긍심도 악이라고 규정했다. 구걸을 금지했으며, 지나치게 자선을 하는 것도 ‘도덕적 해이’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나쁘다고 말했다. 오늘날 개신교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이 인물에 대해서 [문명이야기]를 저술한 철학자 윌 듀란트는 이렇게 평가한다.
이 남자를 좋아하고 싶어도, 좋아하기 힘들다는 사실만 거듭 확인할 뿐이다. 길고 찬란한 몰상식의 역사 중에서도 가장 부조리하고 신성모독에 가까운 하느님 개념으로 인간의 영혼을 암울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이 사람이다.
Will Durant, vol. 6, Reformation, 4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