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브릿지의 구멍가게: 심층결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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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하는 번역 온라인레슨 20

이 레슨은 [갈등하는 번역 24. 매트릭스를 넘어 세상 속으로: 심층결속성 / 25. 원작의 존재 이유와 번역의 존재 이유: 중재로서의 번역]에서 다루는 내용을 설명합니다.

심층결속성이란, 텍스트 밑에서 의미의 연속체를 구축하고 조직하고 생성하는 관계망을 말합니다. 심층결속성은 말 그대로 텍스트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특성으로, 언어사용자의 관념적/의미적 인식에 의존하여 만들어지는 보이지 않는 의미의 관계망입니다.

예문을 보면서 설명하면 그 개념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예문은 영어 신문기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1,500개 아웃렛의 구매력은 영국과 미국 전역의 소비자들에게 상당한 가격인하를 제공할 수 있는 여력을 제공한다. 가장 큰 상점 헤로즈는 지금까지 다른 아웃렛과 통합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혹시 합병을 하게 되더라도 상점의 특성과 선택권을 보존하기 위하여 별도로 운영될 것이다. 많은 기자들이 나를 마치 화려한 나이트브릿지 상점을 마음껏 주무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처럼 묘사한다. 내 생각에, 그것은 참으로 따분하고 한정된 목표에 불과하다.

개별문장이 어렵거나 어색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앞의 문단과 뒤의 문단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구글을 검색해보면 헤로즈는 영국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백화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백화점이 있는 지역이 바로 런던의 ‘나이트브릿지’입니다! 영국의 독자들에게 이러한 정보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지명으로 이 백화점을 언급하는 것은 전혀 어색하거나 낯설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독자들은 이러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윗 문단과 아랫문단 사이에 어떠한 연결고리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심층결속성은 텍스트 표면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심층결속성이 작동할 수 있는 것은 언어적인 장치 때문이 아니라 독자의 지식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심층결속성은 번역과정에서 상당한 골칫거리를 야기합니다. 왜냐하면 번역은 기본적으로, 독자를 바꾸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독자가 달라지면 당연히 독자의 지식도 달라지고, 따라서 심층결속성이 작동하는 맥락도 달라집니다.)

이런 경우 한 가지 해법은 ‘나이트브릿지 상점’을 ‘해로즈’로 교체하여 번역하는 것입니다.

1,500개 아웃렛의 구매력은 영국과 미국 전역의 소비자들에게 상당한 가격인하를 제공할 수 있는 여력을 제공한다. 가장 큰 상점 헤로즈는 지금까지 다른 아웃렛과 통합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혹시 합병을 하게 되더라도 상점의 특성과 선택권을 보존하기 위하여 별도로 운영될 것이다. 많은 기자들이 나를 마치 화려한 헤로즈를 마음껏 주무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처럼 묘사한다. 내 생각에, 그것은 참으로 따분하고 한정된 목표에 불과하다.

이렇게 번역하면 한국의 독자들은 텍스트의 결속성을 쉽게 인지할 수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풀이하자면, 심층결속망(헤로즈-나이트브릿지 상점)을 표층결속망(어휘반복: 헤로즈-헤로즈)으로 바꿈으로써 배경지식 없이도 텍스트의 일관성을 쉽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변형은 텍스트의 성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 바꾼다고 해서 위의 예문이 완벽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헤로즈’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위 예문에서 ‘헤로즈’를 실제 모습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상상할 확률이 높습니다. 일반적으로 ‘상점’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모습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상점’이라는 말이 ‘아웃렛’이나 ‘합병’과 같은 말과 함께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독자들은 뭔가 낱말들의 키높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실제로 해로즈의 모습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규모가 큰 상점을 우리는 ‘상점’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대개 ‘백화점’이나 ‘유통매장’ 같은 어휘를 사용하죠. 이처럼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할 때는 자신의 글을 읽고 독자들이 머릿속에서 무엇을 떠올릴지를 늘 고려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가상의 독자와 대화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심층결속성이라는 개념이 글을 쓰거나 번역하는 사람에게 알려주는 가장 핵심적인 교훈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러할 것입니다.

의미는 텍스트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판단과 해석 속에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어떠한 텍스트도 독자와 협력하지 않고서는 의미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독자와 소통하지 않는 글은 독자가 이해할 수 없으며, 그런 글은 독자들이 아예 읽지도 않습니다.

번역서의 경우에는, 독자들이 갈등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해외에서 원서정보를 보고 그 책의 번역서를 읽고자 선택한 경우, 책을 읽고자 하는 동기는 이미 충만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막상 번역결과물이 독자와 협력하지 않는다면 독자들은 화가 나겠죠.

모든 글쓰기는 근본적으로 외줄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역의 경우 거시적인 맥락에서 볼 때, 출발텍스트와 독자의 이해 사이에서 외줄을 타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순간 줄에서 떨어지고 번역은 실패하고 큰 부상을 입을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번역은 독자를 바꾸는 행위입니다. 당연히 원문과 번역문의 결속망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표층결속망이나 심층결속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것은 ‘텍스트’가 될 수 없습니다. 텍스트가 되기 위해서 번역문의 결속망은 원문의 결속망과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결속망이 달라지면 어휘나 문장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새로운 항목이 삽입될 수도 있고 다른 것으로 교체될 수도 있고 원문에 있던 항목이 생략될 수도 있습니다. 문장이나 문단의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으며 심지어 ‘각색’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주어와 술어가 호응하지 않는 문장을 우리는 ‘비문non-sentence’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맨 처음 예문처럼 심층결속이 작동하지 않는 글은 ‘비텍스트non-text’라고 합니다. 글자만 모아놨다고 모두 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비텍스트를 생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할리데이M.A.K. Halliday가 지적했듯이 이 세상에 비텍스트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옹알이하는 아기, 정신병자, (형편없는) 번역가 밖에 없습니다. 텍스트성은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입니다.

[갈등하는 번역] 온라인레슨 시즌1은 이것으로 마칩니다. 지난 20주 동안 열심히 읽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온라인레슨을 읽어주신 번역가 여러분들, 또는 번역가가 되고자 하는 분들 모두 훌륭한 번역가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주부터는 [갈등하는 번역] 온라인레슨 시즌2를 시작합니다. 시즌2는 진행방식을 약간 바꿔서, 매주 화요일 “이메일 뉴스레터”로 발행할 예정입니다. 물론 뉴스레터 콘텐츠의 ‘일부’는 블로그를 통해서도 공유하겠지만, 뉴스레터만으로 접할 수 있는 정보가 훨씬 많을 것입니다. 아래 이메일주소와 이름(또는 닉네임)만 입력해주시면 뉴스레터를 받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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