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벳의 발명과 유럽의 탄생

배를 타고 다니며 진귀한 물건들을 사고파는 페니키아인들에게는 물건의 가치와 거래내역 등을 기록해둘 수 있는 도구가 필요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와 이집트의 상형문자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페니키아인들은 이 둘의 장점을 살려 ‘소리’를 표시하는 기호 ‘알파벳’을 최초로 만들어낸다.

알파벳의 발명은 인류역사의 발전방향을 바꾸어버린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쐐기문자와 상형문자는 여전히 전문 필경사들만 쓰고 읽을 수 있는 문자였던 반면, 알파벳은 누구나 쉽게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문자였기 때문이다. 최소 600개, 많게는 6000개나 되는 쐐기문자나 상형문자를 외워서 문법에 맞게 배열하고 읽는 것은 일반인이 쉽게 배울 수 없다. 하지만 알파벳은 20개 정도 글자만 외우면 누구나 쓰고 읽을 수 있다.

기원전 1200년경 비블로스에서 제작된 아히람의 석관에 쓰여진 페니키아 문자
기원전 1200년경 비블로스에서 제작된 아히람의 석관에 쓰여진 페니키아 문자

비옥한 초승달지역에서 발생한 인류 최초의 문명은 일찌기 바다를 건너 서서히 전파되고 있었다. 비옥한 초승달의 문명의 씨앗이 바다 건너 처음 발아한 곳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크레타(Crete)섬이다.

크레타문명은 기원전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크레타문명은 이후 그리스반도 해안에 식민지를 건설할 만큼 융성하였고, 이것이 그리스문명의 원류가 된다.

크레타섬 크노소스에서 발굴된 미노스문명(크레타문명) 유적. 화려한 벽화와 청동유물들이 발굴되었다.

페니키아인들은 최초의 유럽문명이라 할 수 있는 크레타에 자신들이 발명한 알파벳을 전해준다. 알파벳을 전파한 과정은 지금도 그리스신화를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 과정을 그리스인들은 ‘강간’이라는 사건으로 은유한다. 그 신화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에우로파와 카드모스 신화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파는 시돈 해안에서 꽃을 따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는 그녀의 미모와 순수함에 반해 욕정을 느끼고는, 흰 소로 변하여 그녀에게 다가간다.

The Rape of Europa, Nöel-Nicolas Coypel 1722

에우로파를 바닷가로 유인한 제우스는 그녀를 등에 태우고는 바다에 뛰어든다. 겁에 질린 에우로파는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제우스의 목을 끌어안는다.

The Abduction of Europa, Jean François de Troy 1716

크레타섬에 도착한 제우스는 에우로파를 강간한다. 에우로파는 크레타의 여왕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미노스는 크레타의 전설적인 왕이 된다. 유럽에 문명을 최초로 전해준 페니키아의 공주이자 크레타의 여왕 에우로파Europa(또는 에우로페Europe)는 오늘날 ‘유럽’이라는 지명이 된다. 이 이야기는 비옥한 초승달의 문명이 크레타로 전파된 과정을 신화적으로 비유한다.

Minotaur and Naked (Rape), Pablo Picasso 1933

한편, 딸이 유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페니키아의 왕은 자신의 아들 5명에게 지중해 곳곳을 샅샅이 뒤져 에우로파를 찾아오라고 명령한다.

페니키아는 당시 지중해를 지배한 가장 강력한 해상국가였다

다섯 왕자 중에서 그리스지역 수색을 맡은 왕자가 바로 카드모스였다. 몇 개월 동안 그리스를 떠돌았음에도 에우로파를 찾지 못한 그는 절망속에서 신탁을 받기로 한다.

그리스인들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무당에게 찾아가 점을 쳤다. 미래를 예측하는 신의 뜻(점괘)가 바로 신탁oracle인데, 신탁은 대개 모호한 말로 되어 있어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어려웠다.

신탁은 카드모스에게 누이를 찾는 일을 포기하라고 말한다. 대신 암소 한 마리를 앞세우고 채찍질하여 계속 걷게하다가 암소가 지쳐 쓰러지면 그곳에서 암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라고 한다. 그렇게 제사를 지낸 곳에서 카드모스는 강력한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카드모스는 신탁을 그대로 따른다. 정말 암소가 쓰러져 죽었고,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곳은 바로 테베Thebe라는 곳이었다. 테베는 당시 무시무시한 뱀이 도시의 샘을 지키고 있어, 지역주민들이 불안에 떨며 살고 있었다.

Cadmus fighting the Dragon, Hendrick Goltzius 1183

카드모스는 샘을 지키는 뱀과 결투를 벌였고, 마침내 뱀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사람들은 카드모스를 자신들의 왕으로 모신다. 죽은 뱀을 살펴보던 카드모스는 뱀의 이빨을 뽑아 들판에 심는다. 이빨을 심은 곳에서 용맹한 전사들이 나온다.

Cadmus Sowing Dragons Teeth, Peter Paul Rubens c.1636

이 전사들은 카드모스를 호위하는 군대가 되었으며, 이 강력한 왕에게 올림포스의 신들은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딸 하르모니아를 베필로 선물한다. 그리스신화를 통틀어 여신과 결혼한 최초의 인간이 바로 카드모스다.

그리스신화에서 카드모스를 이처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땅에 심은 뱀의 이빨은 바로 알파벳을 상징한다. 페니키아인들이 발명한 알파벳을 그리스에 전해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신화적으로 진술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 신화에 등장하는 중요한 상징은 바로 뱀이다. 바빌로니아의 창세신화(에누마엘리시) 모티브가 유럽문명의 탄생에서도 그대로 전이된 것이다. 서양에서 문명이 전파되는 이야기에는 늘 뱀이 악역으로 등장한다. 문자가 등장하기 이전에 꿈틀거리는 뱀은 여자의 성적인 에너지와 권력을 상징했다. 문명을 전파하는 남자영웅들은 한결같이 신화 속에서 거대한 뱀을 처치한다.

피톤Phyton을 죽인 아폴론의 모습. 뱀을 죽이는 남자영웅 이야기는 서양의 “Dragon Hunting” 서사의 전형이 된다.
여성혐오와 가부장제의 가치가 극에 달했던 르네상스 문화를 상징하는 예술작품. 메두사(뱀/여자샤먼)의 목을 따 들고 서 있는 페르세우스 Peniseus. Benvenuto Cellini

인류역사에서 사라진 페니키아인들은 자신들을 케나아니/키나아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Kenaani/Kinaani는 바로 성경에 등장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Canaan(카나안)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알파벳으로 발명한 페니키아인들은 바로 가나안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 알파벳으로 기록한 최초의 문서가 바로 구약성서다. 페니키아인은 곧 구약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페니키아인들은 고대 히브리인들과 같은 언어을 사용하며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페니키아인들이 섬기는 신들이 구약에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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