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라르와 엘로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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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1079-1144)는 당대의 자유로운 인문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자였다.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뛰어난 학문적 소양으로 발휘하며 강단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는다. 마침내 동료들의 추천으로 파리성당학교 학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또한 많은 시를 썼는데, 특히 그의 연가love song는 매우 유명했다.

1117년 아벨라르의 명성이 치솟는 와중에,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책을 사랑하는 16살 고아소녀가 그의 삶에 나타난다. 노트르담대성당의 사제 풀베르Fulbert의 조카딸 엘로이즈Héloïse였다. 그녀는 아르장퇴유에 있는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매우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그녀의 삼촌은 그녀를 명망가에 시집보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엘로이즈를 파리로 데려와 아벨라르를 개인교수로 붙여준다.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와 엘로이즈Héloïse, 14세기 작품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에 따라, 성당학교의 학장도 성직자와 똑같이 순결한 삶을 살겠다는 맹세를 해야 했다. 하지만 길고 지루한 여름날 오후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사랑의 마법에 빠졌고, 결국 순결서약을 깬다. 학구적인 이 스승과 학생은 책으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경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랑은 그들을 경솔하게 만들었고 곧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문이 무성해질 때쯤 더욱 당혹스럽게도 엘로이즈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그녀의 삼촌 집에서 은밀히 빼내 브르타뉴에 있는 자신의 가족이 사는 집에 숨긴다. 이곳에서 그녀는 아들을 낳고, 아스트롤라베라는 이름을 붙인다.

아스트롤라베Astrolabe는 천문관측기구다. 11세기 제작된 아스트롤라베.

아벨라르는 자신의 경력을 포기할 결심을 하고 청혼을 하지만 엘로이즈는 그의 경력에 누가 될까 염려하여 청혼을 거절한다. 그녀는 정부情婦로 남겠다고 고집한다. 어쨌든 아벨라르가 학장이나 성직자로 경력을 유지하려면 그의 아내는 수녀가 되어야 했다.

어쨌든 삼촌 풀베르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엘로이즈는 고집을 꺾고 비밀리에 결혼을 올린다. 아기는 아벨라르의 누이에게 맡기고 그들은 파리로 돌아온다. 부부는 따로 살면서 어떠한 불미스러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이 예전과 똑같이 생활을 이어나갔다.

밀회를 나누다 풀베르에게 발각되는장면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풀베르는 아벨라르를 파멸시키겠다고 마음먹는다. 우선 아벨라르가 비밀리에 결혼을 했다는 소문을 은밀하게 퍼트려 성당학교 학장으로서 명성을 크게 훼손한다. 엘로이즈는 아벨라르를 위해, 자신은 결혼한 적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부인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스스로 매춘부라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결국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고, 엘로이즈는 아르장퇴유 수녀원으로 몰래 돌아간다. 자신의 계획을 망친 풀베르는 마침내 밤중에 자객들이 보내 아벨라르를 제압한 뒤 거세한다. 거세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고, 아벨라르는 충격과 치욕과 절망 속에서 수도사가 된다. 엘로이즈 역시 결국 수녀가 된다.

거세당하는 아벨라르.

아벨라르는 세상에서 격리된 채 오랜 세월 고독한 시간을 보낸다. 아내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의 모범적인 자세를 보고 교회의 권력자들은 그가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하여 다시 강단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엘로이즈 역시 수녀로서 상당한 존경을 받았고, 마침내 대수녀원장 자리에 오른다. 아벨라르는 나중에 친구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불행했던 운명을 회고하는 《내 고통의 역사》라는 책을 펴낸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슬픔과 비교하면 당신의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비애에 가득한 이 책은 엘로이즈의 손에도 들어갔고, 이 책을 읽고 그녀는 편지를 쓴다. 그녀의 편지는 오늘날까지도 연애문학사상 가장 감동적인 글로 여겨진다.

그녀의 아버지가 아닌 스승, 그녀의 오빠가 아닌 남편에게. 그의 딸이 아닌 시녀, 그의 누이가 아닌 아내가. 아벨라르에게, 엘로이즈가.

사랑하는 이여,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쓴 당신의 편지를 최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눈물 없이 읽을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이야기, 그 일들이 새삼 제 마음속 슬픔을 한없이 가득 채웁니다… 당신에게 간청하오니, 우리에게 자주 편지하셔서 당신이 아직도 겪고 있는 파멸의 고통을 들려주소서. 적어도 우리만은 당신이 슬퍼할 때나 기뻐할 때나 당신의 동반자로 남아있으리라는 사실은 알게 될 것입니다….

내 소중한 이여… 당신의 명령에 순종하여 나는 버릇도 관심도 바꾸었습니다. 당신이 내 몸과 마음의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단지 결혼서약을 지키거나 지참금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내의 이름이 아무리 신성하고 합법적이라고 해도, 친구라는 말이―당신에게 치욕이 되지 않는다면―첩이나 매춘부 라는 말이 내게는 더 달콤하게 들렸습니다… 하느님을 증인으로 삼겠습니다. 온세상을 다스리는 아우구스투스가 내게 결혼의 영광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내게 세상을 모두 준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내가 영원히 다스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게 더 귀중한 것 더 숭고한 것은 그의 황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첩이 되는 것입니다…

왕이나 철학자 중에 누가 당신의 명성에 비할 수 있을까요? 당신을 보기 위해 어느 왕국, 어느 도시, 어느 마을이 안달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사람들 앞에 섰을 때 당신을 보기 위해 서두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부인, 어떤 시녀가 당신이 자리에 없을 때 당신을 갈망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당신이 자리에 있을 때 가슴을 불태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여왕, 어떤 힘있는 귀부인이 나의 기쁨과 나의 침실을 부러워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에게 간청하오니, 내 말에 귀 기울여주세요… 그저 당신이 쓴 글―당신이 듬뿍 담겨있는 글―을 읽는 동안 매혹적인 당신의 이미지가 떠올라 당신 곁에 있다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더 많은 것을 바랄 자격이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으니까요… 어린 소녀였던 내가 혹독한 수녀원에 들어간 것은… 신앙심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온 몸을 바쳐 헌신하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 앞에서, 나는 당신에게 간청하오니, 어떤 방법으로든, 내게 몇 마디 위안의 글이라도 써서 당신이 내 눈앞에 나타날 수 있게 해 주세요… 안녕히, 나의 모든 것이여.

암흑시대에서 깨어나면서 유럽은 한동안 여성성과 남성성이 균형을 이루는 평화로운 시기를 누린다. 하지만 그러한 균형을 깨고자 하는 교회가 다시 세력을 장악하면서, 여자들은 그동안 누리던 권리를 잃고 만다. 이제 집단적으로 남성성이 여성성을 압도하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앞으로 닥쳐올 재앙과 비교할 때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비극은 한낱 사치스러운 로맨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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