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금욕주의가 불러온 도덕의 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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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역사에서 수도원은 여성의 지위를 떨어뜨리고 야만적인 사회풍경을 만들어내는 데 그 어떤 사회제도보다 큰 영향을 미쳤다.

자연은 주의깊은 보정을 통해 남녀 출생비율을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해오면서, 남녀가 서로 짝을 찾을 수 있게 한다. 주기적으로 발발하는 전쟁은 남자의 수를 큰 폭으로 줄인다. 여자들 또한 출산과정에서 많이 죽기 때문에 남녀성비는 효과적으로 균형이 맞춰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확산되는 수도원은 성비의 균형을 깨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자리잡는다. 남자 하나가 수도원에 들어가면 여자 한 명이 가정을 이룰 수 없게 된다.

중세성직자들의 사생활

하지만 성적 충동은 단순한 서약만으로 억누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기독교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회에서 영적인 이유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수도원에 들어간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성욕을 억제하기 위해 자제력을 발휘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수도사들이 가까운 동네의 여자들과 은밀하게 밀월을 즐기는 일은 유럽전역에 평범한 일상처럼 자리잡았다. 수도사들이 무절제하게 ‘오입질’을 하는 세태를 한탄하고 비난하는 글이 발표될 정도로 이러한 일탈은 심각하고 흔한 것이었다.

도덕적인 문제를 제쳐 놓더라도, 이러한 일탈은 기독교에서 늘 강조하는 ‘신성한 결혼’이라는 가치를 헛소리로 만들어버렸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인간사회의 가장 보편적인 모습은, 남자와 여자가 한 집에 살면서, 서로 성욕을 충족시켜주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마당에서 즐겁게 뛰어노는 것이다. 이는 하지만 이 ’설거지부인들’은 시간의 탄생 이후, 이전의 어떤 문명 속 주부와도 달랐다. 수도사는 혼외자와 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는다 해도 부양할 어떠한 법적 의무도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수도사들이 불륜을 저질렀기에, 자신들의 과오를 규율할 규칙이나 법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반면, 수도사는 사적으로 재산을 소유할 수 없다는 수도원의 규칙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내연녀들은 자신과 오랜 기간 정을 통한 수도사가 죽더라도 유산을 한푼도 받을 수 없었다.

실제로 수도사들은 엄청난 사생아를 산란하듯 쏟아냈다. 1018년 격노 속에서 진행된 파비아공의회는 성직자의 피를 물려받고 태어난 아이는 종신노예로 살아가야 할 것이며 어떤 유산도 받지 물려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이자 연대기작가였던 포티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악습으로 인해, 우리 서방세계는 애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들로 넘쳐나게 되었구나.”

Photius, 820-891

사회에 도덕적 모범이 되어야 할 곳에서 오입질이 흔하게 벌어진다면, 일반인들 역시 그런 짓을 좀 따라한다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유럽에서 결혼제도는 거의 몰락할 위기를 맞는다.

매춘의 성행

암흑시대 말기에 만들어진 기독교 참회규정서에는 매춘에 관한 고해성사가 들어있지 않다. 죄목에 들어있지 않으니 매춘이 중세시대에 별다른 문제가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그와 정 반대였다. 중세시대 유럽의 도시에는 거의 빠짐없이 매춘이 성행했다. 매춘이 너무나 성행한 나머지 툴루즈, 아비뇽, 프랑크푸르트, 뉘른베르크를 비롯한 도시들은 매춘을 아예 합법화할 것인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16세기 네덜란드의 매춘굴을 묘사한 그림. Joachim Beuckelaer – A Brothel [1562]

1177년 클레르보의 수도원장 앙리는 “고대의 소돔이 폐허 속에서 다시 솟아났다”고 허탈해하기도 했다. 또 한 성직자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 현실을 개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숙한 여인들이 거리를 안심하고 다닐 수조차 없게 되었구나.

Paul Lacroix, History of Prostitution, 1: 733-42

이러한 상황에서, 11세기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성직자 수절 명령은 상황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켰다. 교회의 몇몇 고위성직자들은 도덕이 땅에 떨어진 현실에 분개했지만, 그러한 현실이 엄격한 수절을 요구하는 교회 자신이 만들어낸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는 나가지 못했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문란한 성생활로 인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 사생아들이었다. 이들은 중세유럽 사회의 심각한 불안요소가 된다. 법적 지위도 갖추지 못한 채 사생아로 태어나 자란 남자아이들은 거친 남성적 문화 속에서 자라면서 무력으로 권력을 잡는 것만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중세역사, 또 중세에 유행한 전설과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서출이다. 아더왕, 가웨인, 롤랑, 정복왕 윌리엄은 물론,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기사들도 모두 서출이다. 많은 이들이 깡패나 도적떼가 되었다. 물론 자신들의 아버지처럼 수도원에 들어간 이들도 많았다.

Song of Roland
오늘날 욕으로 많이 사용되는 bastard는 ‘서출자식’이라는 뜻이다. 완곡한 표현으로는 misbegotten/illegitimate children이라고 부른다.

사생아로 태어난 여자아이들은 평생 천한 일을 하거나 노예로 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의 어머니처럼 다시 설거지부인이 되는 이들도 많았고, 아예 매춘부로 나서는 이들도 많았다. 이런 상황은 지역정부가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사회적 병폐를 초래했다.

곳곳에 퍼진 매춘과 쏟아져나오는 사생아로 인해 유럽의 공중도덕은 완전히 전복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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