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교황들의 행진과 로마약탈

This article is written by

This article is published on

This article belongs to the category

To read this article you need time

7분

This article received readers’ responses

0

This article consists of keywords

undefined
카노사의 굴욕 Hugh of Cluny, Holy Roman Emperor Henry IV, and Matilda of Tuscany

그레고리오 7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면서 벌어진 카노사의 굴욕(1077) 이후 교황권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유럽에서 최고의 권력을 영위하던 교황은 점차 타락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15세기 들어서면서 그 행태는 겉잡을 수 없이 추락한다. 암살을 공모하고, 전쟁을 축복하고, 성직을 팔고, 끊임없이 돈, 권력, 개인적 이득을 탐했다. 탐욕, 음모, 부패, 옹고집, 비겁함 등 온갖 세속적인 악덕을 모두 보여준다.

교황의 실정이 거듭될수록 세속의 왕들, 평신도들, 성직자들은 개혁을 요구하였지만, 그 모든 결정권을 가진 교황들은 개혁요구를 계속 무시했다. 오히려 더욱 추악한 교황들이 계속 등장하였고, 결국 영원의 도시 로마는 완전히 파괴되는 비극을 맞이한다.

식스토 4세 Pope Sixtus IV

1470년 즉위한 식스토 4세는 교황권을 급속하게 몰락시킨 장본인으로 기억된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20대에 불과한 자신의 조카 둘을 서둘러 추기경으로 임명한 뒤, 지금으로 따지면 수십억 원에 상당하는 급여를 지급한다. 더욱이 이 두 조카는 무절제한 사치와 방탕으로 악명이 높았다.

교회에서 교황 다음으로 높은 직위라 할 수 있는 추기경은 원래 서품을 받은 성직자만 오를 수 있는 자리이지만, 식스토 4세는 이러한 최소한의 조건도 간단하게 무시해버렸다. 친분이 있는 사람들, 돈을 많이 낸 사람들에게 추기경 자리를 내주었다. 대부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추기경으로 임명된 이들은 대부분 자신을 ‘군주’라고 생각했다. 하인 수백 명을 거느리며 호화로운 궁전에서 살았으며, 외출할 때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사냥개와 매를 끌고 다녔다. 식스토 4세는 재위기간 동안 자신의 친인척에게 모두 교회의 주요 직위를 나눠줬는데, 당연히 이들 중 대다수는 전혀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대주교와 맞먹는 어떤 고위직에는 8살 아이와 11살 아이가 오르기도 했다.

인노첸시오 8세 Pope Innocent VIII

식스토 4세 다음 교황이 된 인노첸시오 8세(1484-92)는 역사상 최초로 사생아를 둔 교황이다. 그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추기경들은 그를 ‘성스러운 아버지’ 자리에 앉히는 데 모두 동의한다.

교황이 되고 난 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불명예스럽게 태어난 자신의 아들 프란치스케토Franceschetto를 출세시키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케토는 밤마다 폭력배들과 로마거리를 돌아다니며 여자들을―심지어 수녀들도―납치하여 집단강간했으며, 가정집에 침입하고 약탈하며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어떤 죄를 저지르든 아버지 교황이 모두 보호해주었기 때문이다.

1486년 인노첸시오 8세는 프란치스케토를 메디치집안 상속녀와 결혼을 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교황청에서 성대한 파티를 여는데, 교황이 머리에 쓰는 관을 저당잡혀야 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돈을 쏟는다.

한없는 사치로 인해 예산이 부족하자 인노첸시오 8세는 교황청에 많은 직책을 신설하여 엄청난 돈을 받고 팔았다. 사람을 죽인 살인자도 돈을 내면 용서하고 자유를 주었다. 이에 대한 비난에 대해 한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주님은 죄 지은 자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네. 살아서 돈을 내길 바라지.

알렉산데르 6세 Pope Alexander VI

성직자라기보다는 권모술수에 뛰어난 정치인에 가까웠던 스페인 출신 로드리고 보르자는 성직을 팔아 챙긴 엄청난 돈으로 추기경들을 매수하여 교황자리에 오른다. 그가 바로 인노첸시오 8세 다음에 교황이 된 알렉산데르 6세(1492-1503)다. 알렉산데르 6세 역시 교황에 오르자마자 교회의 주요직책을 자신의 친인척으로 채운다. 어떤 이는 그의 행각을 보며 이렇게 비꼬았다.

교황이 10명 정도 된다고 해도 교회의 직책을 다 채우지는 못할 만큼, 자기 사촌들을 끌고 왔다.

알렉산데르 6세에게도 사생아가 있었는데, 자그마치 16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에서 자신의 혈육으로 인정한 사생아만 8명이었다. 특히 아들 체사레와 딸 루크레치아과 함께 그가 벌인 모략과 범죄는 로마시대 네로와 칼리굴라 이후 볼 수 없었던 타락의 극치를 달렸다.

교황에 오르기 바로 전인 59살 때 그는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19살밖에 되지 않은 아름다운 여자 줄리아 파르네세를 자신의 정부로 삼는다. 파르네세를 먼저 다른 남자와 결혼시킨 뒤, 결혼식 첫날 밤 그녀를 교황청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왔다.

그는 또한 나중에 ‘알밤연회’라고 이름붙여진 만찬을 주재하기도 한다. 교황청 의전관 부르카르트Johann Burchard는 매우 건조한 문체로 이 연회에 대해 묘사한다.

만찬이 끝난 뒤 손님들은 아름다운 창녀 50명과 춤을 추었는데, 창녀들은 처음에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곧 모두 알몸이 되었다. 촛대를 늘어놓은 바닥에 알밤을 흩뿌려 놓았다. 창녀들은 알몸으로 바닥에 놓인 촛불 사이를 기어다니며 ‘창조적인’ 방식으로 밤을 주웠다. 교황과 체사레와 루크레치아는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연회는 손님들에게 모두 보는 앞에서 창녀들과 섹스를 하도록 유도하면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그 일’을 가장 많이 한 사람에게 상을 주겠다고 누군가 소리쳤다. 귀족은 물론 고위성직자들도 값비싼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경쟁에 뛰어들었다.

알밤연회 Banquet of Chestnuts. 알렉산데르 6세 시절 교황청에서 열린 대규모 섹스파티.

부르카르트는 또한, 알렉산데르 6세와 루크레치아가 교황청 앞마당에서 흥분한 종마가 암말 위로 올라타는 모습을 보며 ‘크게 웃으며 즐거워했던’ 일도 기록하였다. 또한 유죄를 선고받은 추기경들을 교황청 앞마당에 모조리 끌어내 풀어놓고는 체사레가 화살을 쏴서 한 명씩 죽이기도 했다. 지금 보면 믿기 어려운 기행이지만, 이러한 내용은 여러 사람들의 기록 속에 공통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꾸며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알렉산데르 6세는 교황에 즉위한 초기에는 정통성에 약점이 있었던 만큼 반대파들에게 비교적 관대했지만, 갈수록 관용을 잃어갔다. 한 번은 자신 앞에서 기분 나쁜 농담을 했다는 이유로 그를 이단으로 몰아 혀를 뽑고 팔을 잘랐다.

그는 72살에 이름 모를 열병을 앓다가 갑자기 죽는데,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건드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새까만 혀를 내민 채 부풀어오른 그의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기 위해 발목에 밧줄을 묶어 말에 매달고 질질 끌고 갔는데, 그 모습을 보고 로마사람들은 환호했다.

교황 알렉산드르 6세(Rodrigo Borgia), 그의 情婦 반노차 카타네이Vanozza de Cataneis, 이들의 딸이자 교황의 情婦 루크레치아Lucrazia

알렉산데르 6세가 기독교세계에서 최악의 교황으로 낙인찍힌 이유는 무엇보다도 근친상간 때문이다. 그의 딸 루크레치아가 18살에 아들(조반니)을 낳는데, 문제는 이 아이가 오빠(체사레)의 씨인지 아버지의 씨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가 태어난 뒤 알렉산데르 6세는 공식칙서와 비밀칙서 두 개를 발부한다. 공식칙서에서는 조반니를 교황의 아들 체사레가 어떤 여자에게서 낳은 아들이라고 명시한 반면, 비공식칙서에서는 조반니를 교황이 바로 그 ‘어떤 여자’에게서 낳은 아들이라고 명시한다. 하지만 조반니의 어머니가 루크레치아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따라서 결국 아버지와 아들이 딸 또는 여동생과 근친상간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사적 단서가 되었다.

율리오 2세 Pope Julius II

세속 군주들에게 빼앗긴 교황령 영토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용병을 모아 군대를 이끌고 직접 출정한다. 그는 기독교도들이 모여 사는 도시를 향해 막무가내로 대포를 쏘라고 명령했고, 자신의 명령에 반발하는 장교들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레오 10세 Pope Leo X

다음 교황에 오른 레오10세(15ㅇ13-21)는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 방탕한 씀씀이로 인해 교황청은 재정적 파탄에 처했다. 그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는데, 손님들에게 순금으로 만든 접시에 음식을 대접한 다음, 연회가 끝나면 이 순금접시들을 창 밖으로 던져 테베레강에 버렸다. (물론, 이것은 보여주기 위한 쇼였다.)

레오 10세의 어마어마한 씀씀이로 인해 금고에서 빠져나가는 돈을 보충하기 위해 교황청은 돈을 긁어모을 묘안을 생각해내는데, 이것이 바로 ‘면죄부’를 파는 것이었다. 교황이 서명한 이 문서를 돈을 주고 사면 그동안 지은 죄가 사해진다고 선전했다. 심지어 이미 죽은 일가친척을 위해 면죄부를 구입하면 그들을 연옥에서 꺼내 천국으로 보내준다는 ‘대리면죄부’도 팔았고, 또 자신이 앞으로 저지를지 수 있는 죄에 대한 벌을 미리 면제받을 수 있는 ‘면벌부’도 팔았다.

당시 면죄부 판매에 앞장섰던 수도사 요한 테첼Johann Tetzel이 내세운 마케팅 슬로건은 사람들을 상당히 현혹했다.

헌금함 속 동전이 쨍그랑하는 순간, 연옥에서 고통받던 영혼은 천국으로 간다.

그토록 면죄부를 팔았음에도 레오10세가 세상을 떠날 때 교황청의 금고는 바닥을 드러냈고, 심각한 재정파탄 상태에 놓였다.

클레멘스 7세 Pope Clement VII

레오 10세 다음으로 하드리아노 6세가 교황에 오르지만 즉위 2년 만에 사망한다. 추기경들은 재정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메디치 가문 출신 추기경을 교황으로 추대하는데, 그가 바로 클레멘스 7세(1523-34)다. 그는 교황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스페인의 왕 카를 5세와 맞서다가 결국 궁지에 몰렸고, 마침내 카를 5세는 로마를 향해 진격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신앙심이 깊었던 카를 5세는 로마를 100킬로미터를 남겨놓고 진격을 멈춘다. 그는 교황청으로부터 6만 두캇ducat을 받고 휴전협정을 맺은 뒤 스페인으로 돌아간다. 문제는 전쟁이 중간에 멈추자 갈곳을 잃어버린 용병들이었다. 배도 고프고 충분한 보상도 받지 못하여 불만에 휩싸여 있는 이들을, 로마와 적대관계에 있던 이탈리아의 여러 공국들이 부추겨 로마로 돌진하도록 한다.

로마 대약탈 Sac de Rome

1527년 5월 6일 스위스, 네덜란드, 독일, 스페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카를 5세가 끌고온 용병들이 로마로 밀려들어왔다. 야만인들의 축제가 로마 전역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교황과 추기경들은 황급히 성앤젤로 요새로 피신했지만, 로마의 주민들은 강간, 학살, 방화, 약탈의 희생자가 되었다.

로마 대약탈 Sacco di Roma. Francisco Javier Amérigo Aparicio, 1884.

1100년 전 반달족에게 짓밟혔을 때보다 상황은 더욱 처참했다. 폭도들은 집집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약탈하고, 무차별적으로 강간하고 살인했다. 테베레강은 둥둥 떠다니는 시체로 가득했으며, 도시 곳곳에 불길이 치솟았다. 폭도들은 약탈한 추기경의 옷을 입고 성베드로광장을 활보했다. 교회에 쌓여있던 금은보화도 모두 약탈했으며, 수녀들은 폭도들을 위해 임시로 마련된 간이유곽으로 끌려가 성노예가 되었다. 로마를 파괴한 이 폭도들도 역시 신심깊은 기독교도들이었다.

그리스도 세계에서 가장 신성한 도시 로마의 치욕은 너무도 처절했다. 결국 6개월 뒤 로마에 역병과 기근이 찾아온 뒤에야 침입자들은 이제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도시를 떠났다. 6개월 동안 로마 인구의 3분의 2가 학살되었다. 유럽인은 이 소식을 듣고 경악하고 슬퍼하기보다는, 지난 80년간 방탕했던 교황들에게 하느님이 천벌을 내린 것이라며 기뻐했다.


이 글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남겨주세요

워드프레스닷컴에서 웹사이트 또는 블로그 만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