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면서 아리아인들의 사상과 문화는 인도의 전반적인 관습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예컨대 ‘사람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다’는 믿음에 기반하여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만들어낸 ‘카스트’라는 개념은 개개인에게 완벽하게 주입되어, 지금까지도 완전히 깨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남편이 죽으면 미망인을 함께 태워죽이는 사티Sati, 남자의 눈에 띄지 않게 여자를 격리하는 푸르다Purdah, 여아살해 같은 풍습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마침내 BC300년경, 아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지배규범을 정리한 마누법전을 만들어낸다. 마누법전은 여러 측면에서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법전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를 기본원리로 삼고 있는 마누법전은, 함무라비법전과 마찬가지로 피지배계급과 여자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을 목표로 한 법령을 담고 있다.
BC327년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이란고원을 넘어 침공해오기도 했으나 인도문명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리고 1000년 뒤(AD700) 아라비아에서 흥기한 무슬림세력이 이란고원을 넘어 인도를 점령한다. 이들은 인도를 500년 동안 통치했는 데 그 기간 동안 가부장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고대인도의 여성친화적인 전통은 지금도 (특히 드라비다인들이 거주하는 남부지역에) 여전히 남아있다.
프로테스탄트 붓다의 등장
2차 아리아인들은 브라미문자를 이용해 베다의 성스러운 이야기를 기록했지만, 실생활에서는 자신들의 방언을 사용하였다. 결국 기원전 500년경 산스크리트어는 사멸한다.

아리아인이 지배한 지 1000년이 지나고 사회체제가 안정화되었을 때쯤, 힌두교는 온갖 토착신앙과 결합하며 신들도 무수히 늘어나고 브라민의 종교의례는 더더욱 은밀하고 복잡해졌다. 힌두교 교리도 다원화되면서 교리 자체가 모순되는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대대적인 종교개혁이 필요한 상황이 도래했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 베다를 숭배하는 신앙과 의례에 의문을 던지며 힌두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상가들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논리적 사고가 융성하는 한편, 초인적인 수행관습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모두 사제를 통하지 않고 직접 신과 합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예컨대 자이나Jaina(‘완전히 깨달은 자’라는 뜻)는 육체적 욕구를 모두 부정함으로써 영성의 지고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굶어 죽는 것을 위대한 승리라고 여길 정도로 극단적인 교리를 내세웠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추종했다.
반대로 박티신앙Bhakti cult은 감각을 통해서만 신과 교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황홀경에 이름으로써 신과 교감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종교적 의례에서 원초적인 에너지를 마구 분출하는 춤, 노래, 고함지르기, 섹스를 행했다. 이들 역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기원전 563년 히말라야 기슭에 자리잡은 작은 왕국의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는 ‘모든 존재가 하나’라는 자연의 고귀한 진리를 거부하는 ‘자아’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 고통과 번민이 발생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자아의 소멸’만이 깨달음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며 따라서 열반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열반nirvana’은 산스크리트어로 ‘소멸’이라는 뜻이다.

싯다르타는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붓다’가 된다. 붓다Buddha佛陀란 ‘깨어난 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가 눈을 떴을 때 눈 앞에는 그에게 깨달음을 갈구하는 중생들이 모여 있었다. 침묵 속에서 치열하게 자기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얻은 통찰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로, 전달할 수 있을까? 이보다 역설적 상황은 없을 것이다. 붓다는 결국 다시 보디사트바로 한 단계 내려와 이 땅에 머물며 중생에게 깨달음을 전하기로 마음먹는다. 보디사트바Boddhisattva(보리살타:보살)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말로 ‘이제 곧 붓다가 될 사람’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붙잡고 매달린다. 부모는 자식에 집착하고, 여자는 자신의 외모에 집착하고, 남자는 지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걱정한다. 사랑, 인기, 돈, 젊음, 건강, 재산, 명예, 궁극적으로 삶 자체도 시들고 변하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통과 상실에 무심해질 수만 있다면 번뇌는 멈출 것이다. 욕망하지 않는 자만이 자유로워질 것이다. 관계와 열정이 주는 기쁨도 깨달음 앞에서는 바람 앞의 촛불에 불과하다.
이로써 붓다는 인류 최초로 신이 없는 종교를 세운다. 초자연적 영역에 사는 온갖 힌두의 신들을 모조리 내친다. 신이란 인간들이 거대한 망상 속에서 만들어낸 잡다한 요괴에 불과하다. 거룩한 의례, 사제, 기도, 악마, 천사, 신앙, 예배, 희생, 헌신, 기원, 정령, 화신 등 모든 것이 쓸데없는 헛것이다. 종교적 위계나 신분이나 의례는 모두 지배자들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경전의 성립과 가부장적 교리의 등장
왕궁에서 성장한 싯다르타는 당연히 문자라는 새로운 기술을 일찍이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탐구심이 대단했던 사람이었기에, 이른 나이에 읽고 쓰는 법을 터득했을 것이다. 붓다의 고차원적 깨달음 역시 글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훈련한 선형적 인지방식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깨달음이나 설법을 절대 글로 남기지 않았다. 글자만으로 이루어진 내러티브로는 자신이 경험한 통찰의 진정한 모습을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의 뛰어난 현자들이 모두 그랬듯, 붓다는 은유와 대화를 통해서만 진 리의 본질을 설명했다.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자신의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정하고 관대하고 자비롭고 공손하고 용감했다. 증오를 사랑으로 바꾸라고 조언했다. 비폭력은 그가 주창한 교리의 초석이었다. 붓다는 평등의 원리를 설파했다. 한 번은 매춘부와 함께 저녁을 먹어 제자들에게 공분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붓다가 열반하자마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보존하고 전파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가르침은 대중이 따르고 실천하기 어려웠다. 열반에 이르기 위해 그토록 긴 시간 노력해야 한다면 누가 배우고 따르려고 하겠는가? 결국 승려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간단하고 알기 쉽게 제시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고 마는데, 그것은 바로 붓다를 신으로 만들어 섬기는 것이었다.

붓다의 말씀을 모은 최초의 팔리어 경전은 붓다가 죽은 지 500년이 지난 뒤 만들어진다. 500년은 정말 긴 시간이다. 팔리경전이 만들어진 이후 2000년 동안 불교는 무수한 종파로 갈라졌다. 문자로 기록된 뒤에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것이 말로만 전해지던 시기에는 어떠했을까?
무엇보다도 이 500년은, 인도사회에 가혹한 가부장관습이 뿌리내리는 기간과 겹친다. 결국 경전을 작성하는 이들의 상당한 남성적 가치관과 편견이 교리 곳곳에 스며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컨대 승가 안에서 여자(비구니)를 제2계급으로 대하라고 했다는 붓다의 말씀도, 후대에 경전을 기록한 이들이 덧붙인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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