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종교재판: 인신공양과 인종청소

This article is written by

This article is published on

This article belongs to the category

To read this article you need time

6분

This article received readers’ responses

0

This article consists of keywords

로마제국 이후 스페인은 학구적이고 문명화된 가톨릭사회를 유지했다. 피레네산맥으로 유럽대륙과 분리되어있는 덕분에 다른 나라의 영향은 적게 받았으며, 기후 역시 따듯해 경제적으로 상당한 혜택을 누렸다. 르네상스시대 스페인의 해군은 유럽에서 최강 전력을 자랑했으며, 육군 역시 막강하여 유럽 각지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끊임없이 개입하며 영향력을 발휘했다.

중세 스페인의 풍경

아프리카와 지리적으로 인접해있던 탓에 스페인에는 근면한 무슬림들이 많이 이주하여 살았으며 유대인들도 상당수 정착해 살았다. 가톨릭을 믿는 귀족들이 가장 높은 지위를 누렸지만 종교적으로 상당히 관대했기에 여러 종교들이 어울리며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특히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세파르디Sephardi’라고 불리며, 다른 지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영적, 지적 모범이 되었다.

종교적으로 관대한 문화 속에서 유대인들도 상당히 많은 수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콩베르소converso라고 불린 이들은 고위관료, 성직자, 자본가, 의사로 성공을 하며 높은 명망을 누렸다.

스페인 종교재판소 (이단심문소) 문장.

종교재판의 시작

1476년 교황 식스토 4세는 스페인의 왕 페르난도 2세와 여왕 이사벨 1세에게 종교재판소를 독자적으로 설립하고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하지만 초창기에 종교재판소는 유명무실한 기관에 불과했다.

하지만 1483년 도미니코수도회의 수사 토르퀘마다Torquemada가 종교재판소장으로 임명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토르퀘마다는 평화로운 스페인에 분열을 획책하며 콩베르소들이 왕권을 노리고 있다는 온갖 억측과 가짜뉴스를 만들어 퍼뜨린다. 이들은 겉으로만 가톨릭으로 개종했을 뿐 여전히 비밀리에 히브리신앙을 유지하면서 권력을 찬탈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음해하였다.

스페인 종교재판소장 토르퀘마다. 역설적인 사실은, 토르퀘마다가 유대인 혈통이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종교재판소의 고위관료들 중에도 유대인이 많았다.

평화, 안정, 번영을 한껏 누리던 왕실은 편집증적 발작을 앓듯이 한순간에 토르퀘마다의 꾐에 넘어간다. 왕과 여왕은 종교재판소 집행관들에게 가톨릭신앙에서 벗어난 행위나 관습을 엄단하라고 명령한다. 토르퀘마다는 자신의 권한을 대폭 확대하여 저인망식 사상검증에 착수하였고,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반항하는 사람은 누구든 잡아들였다. 본격적인 테러정치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종교재판의 절차

종교재판소에는 온갖 밀고들이 쏟아져들어왔다. “이단”은 사실 어디든 갖다 붙일 수 있는 매우 편리한 혐의였다. 일단 이단이라고 고발된 사람은 납치하듯 끌려가 쥐가 우글거리는 독방에 갇힌다. 그리고 자신의 혐의에 대한 조사를 받는다. 피고들은 자신을 누가 고발했는지, 심지어 자신이 무슨 혐의로 잡혀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초현실적인 재판절차를 거치며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야만 했다.

이단 혐의를 조사하는 방법은 거의 예외없이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고문이었다. 권위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고문을 할 때는 재판소가 지정한 의사 한 명, 공증인 한 명, 종교재판관들이 배석했다.

종교재판관, 의사, 공증인들이 다양한 고문이 자행되는 현장을 감독하고 있다.

이단 혐의로 끌려가면 무조건 고문을 받았다. 이 과정을 피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13살 어린 소녀도, 80대 할머니도 밧줄에 매달았다. (그래도 임산부에게는 약간의 호의를 베풀었다. 출산할 때까지는 고문을 하지 않고 감옥에 가둬놓기만 하였다. 물론 출산하고 난 뒤 곧바로 고문실로 끌려갔다.)

유럽인들이 자주 사용하던 고문 방법

Stake(Impalement): 항문이나 질에 말뚝을 꽂아놓고 며칠 기다린다. 물론 산 채로. 드라큐라(블라드 3세)가 즐겨사용했다.
Strappado (corda): 팔을 뒤로 하여 팔목을 밧줄로 묶어 매단 뒤 줄을 잠깐 놓았다 잡는다. 어깨, 팔목, 손목 관절이 다 빠진다.
Rack: 4지를 묶어놓고 잡아당겨 찢는다.
발바닥을 불로 지진다.
Bondage (BDSM): 많은 유럽인들이 지금도 자신들의 유구한 고문의 역사와 전통을 창의적으로(?) 지켜나가고 있다.

고문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이단’이라고 자백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대부분 화형을 선고받았다. 그들의 재산은 교회가 몰수했다. 몰수한 재산 중 20-50퍼센트는 익명의 고발자에게 주었으며, 나머지는 교회와 군주가 나눠가졌다.

이렇게 이단을 고발하면 경제적 이익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온갖 “창의적인” 이단 고발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막대한 유산을 남기고 이미 죽은 사람들이 이단이었다는 고발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피고가 이미 죽고 없는 경우에는 재판과정이 훨씬 짧게 끝났기 때문이다. 재판에 올라가면 대부분 이단이었던 것으로 결론이 났고, 곧바로 유산을 빼앗을 수 있었다.

종교재판소는 스페인 전역을 순회하면서 재판을 진행했다. 종교재판이 휩쓸고 간 도시는 한 마디로 쑥대밭이 되었다. 실제로 종교재판관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며 저항하는 도시들도 있었지만 종교재판을 방해하는 자들은 모두 이단으로 간주되었고, 그에 따른 처벌을 받았다.

자백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재판에서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어두운 지하감옥에서 마지막 운명을 기다려야 했다. 지역주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종교재판소는 오토다페(auto-da-fé: 믿음의 행위)라고 하는 성대하고 요란스러운 피날레 의식을 펼쳤다. 이단들을 한 자리에 모아 화형시키는 것이다.

넓은 광장에 화형대를 설치하고, 화형대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높은 단을 만들어 종교재판관과 귀빈들을 위한 관람석을 마련하였다. 시민들도 한명도 빠짐없이 광장에 나와 화형식을 지켜봐야 했다. 나오지 않는 사람은 죄인을 동정하는 이단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에 누구도 빠질 수 없었다.

종교재판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대규모 화형식. 오토다페

오토다페가 시작되면 먼저, 무덤에서 파낸 시신과 고문 과정에서 절단된 신체토막들을 담은 무개차가 입장한다. 그 뒤로 이단으로 판결된 이들이 일렬로 사슬에 묶여 끌려 나온다. 말뚝에 이단들을 묶어 세우고, 장작더미 위에 시체토막들을 쏟아붓는다. 이 상태에서 복잡하고 정교한 미사를 거행한 다음, 장작더미에 불을 붙인다. 희생자들의 처절한 비명소리와 울부짖음이 도시 전체를 뒤덮는다. 비명소리가 잦아들고 조용해지면, 깜빡이는 불씨를 재로 덮어 끈다. 이로써 모든 절차가 끝난다.

종교재판이 유럽인들에게 심어준 트라우마

자신의 이웃들, 또는 가족이 불길 속에서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본 주민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들에 대한 일말의 연민이라도 보였다간 이단으로 몰려 자신도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감정을 억누른 채 극심한 충격 속에서 집으로 돌아간다. 문을 잠그고 이웃이나 친구들에게 자신이 혹시라도 부주의한 말 한 마디 던진 적 없는지 돌아보며 공포에 떤다. 아이들 앞에서도 조심해야 한다. 부모가 불경한 말을 내뱉으면 곧바로 신고하라고 아이들을 세뇌했기 때문이다.

하찮은 실수 하나로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위험을 눈앞에서 목격한 이들에게 심리적 공포와 억압은 말 그대로 목을 졸랐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재판관들에게는 이 모든 일이 일상적인 행사에 불과했다. 그들은 이러한 광경을 보며 하품을 하다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오토다페는 스페인 전역을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이처럼 대규모로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희생제의는 일어난 적이 없다.

1789년부터 1801년까지 종교재판소 총무를 지낸 성직자이자 역사가인 후안 안토니오 요렌테Juan Antonio Llorente에 따르면, 종교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480년부터 300년 동안 4만 명이 이단으로 화형에 처해졌으며 40만 명이 ‘중벌’로 다스려졌다.

유대인과 무슬림 추방

스페인 종교재판을 돌아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드러나는데, 기독교가 이단으로 속아내 가장 먼저 처벌한 이들은 바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유대교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던 유대인들은 오히려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토르퀘마다는 종교재판을 진행하면서 유대인들을 모조리 스페인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다는 꼬임에 넘어가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인종청소’에 동의하였고, 결국 1492년 3월 30일 세례 받지 않은 모든 유대인들을 스페인에서 영구히 내쫓는다는 추방령을 선포한다. 유대인들은 90일 안에 떠나지 않으면 모조리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인다.

추방령이 선포되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사는 이웃이었던 유대인들의 불행한 처지를 무수한 스페인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당나귀 한 마리를 주며 집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기도 했고, 스페인에서 빠져나가는 유대인들이 탄 배를 습격하여, 이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넘기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갈 곳이 없었다.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을 뺀 나머지 유럽국가들은 유대인 난민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수한 유대인들이 바다 위에서 질병, 기아로 죽었으며 난파되어 전부 수장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엑소더스는 유대인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이자, 스페인의 수치스러운 역사로 남았다.

유대인들을 추방한 뒤 다음 타겟은 무슬림이었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무슬림을 모리스코Morisco라고 불렀는데, 사실상 당시 무슬림의 상당수가 모리스코였다. 모리스코는 자신들이 스페인을 통치하던 시절 기독교도에게 종교의 자유를 베풀었던 사실을 환기시키며 저항했지만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막무가내로 모리스코들을 잡아 고문하고 불태워 죽였다.

결국 1502년 2월 12일 무슬림 추방령이 선포된다. 4월 30일까지 스페인을 떠나지 않으면 300만 명에 달하는 무어인들은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 스페인의 성직자 블레다Friar Bleda는 이 포고령을 일컬어 “사도의 시대 이후 스페인에서 벌어진 가장 영예로운 사건”이라고 찬양했다.


이 글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남겨주세요

워드프레스닷컴에서 웹사이트 또는 블로그 만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