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박스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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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출판분야에서는 번역자와 협업하는 일이 빈번하다보니 그런 일은 없지만, 번역자와 직접 일을 해보지 않은 분들과 이야기를 할 때, 또는 그런 분들에게 의뢰를 받을 때 난감한 요구를 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컨대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 번역자를 찾아나서는 분들이죠.

어, 이거 우리나라에서도 먹히겠는걸. 제품소개서랑 매뉴얼이랑 마케팅자료 빨리 번역해서 시장에 내다팔자.

음. 한국 가요랑 드라마가 외국에서 이토록 인기 있는데, 한국문학도 번역하면 분명히 인기가 있을거야. 번역해서 아마존에 팔아보자.

판권 없는 외국작품을 가져다가 번역해서 전집으로 만들어 팔면 되잖아. 싸게 빨리 번역해 줄만한 사람 어디 없나?

미국에서 10년을 공부하고 왔어요. 영어는 물론 유창하게 잘 합니다. 저도 번역하고 싶은데 일감 좀 소개해주세요.

번역이야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되지. 뭐 그까이거.

번역을 직접 해보거나, 번역자와 오래 협업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번역을 하든 ‘원문을 던져주면 번역문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것을 번역학에서는 ‘블랙박스 신화black box myth’라고 하는데요. 번역자가 정보를 처리하고 생산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또는 그런 일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번역과정은 ‘블랙박스’ 안에 넣어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번역을 해보면 번역과정은 이러한 신비한 알고리즘이나 전자회로처럼 작동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글쓰기과정과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품질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는 원저자/의뢰자와 깊이 있는 소통을 해야 하고, 번역을 하는 목적, 번역결과물이 사용되는 맥락 등 다양한 주변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원문만 던져주고 알아서 번역해오라고 해서는 결코 좋은 번역결과물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이유로, 번역자와 자주 협업해야 하는 사람들은 ‘클라이언트 교육’을 받으면 좋습니다.)

어. 여기까지는 맞는 이야기인데…

그런데 말입니다… 소위 전문번역가(대개 출판번역가)들은 대부분 원문만 주면 정말 알아서 좋은 번역결과물을 만들어옵니다. 원서를 받고 나면 마감 때까지 출판사와 연락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거 참 신기하죠?

어쩌면 블랙박스 신화가, 신화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This is a black… oops, orange box.

‘블랙박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항공기나 자동차의 비행/주행 기록 저장장치입니다. 하지만 정확한 이름은 ‘비행기록장치flight recorder’이고, 전혀 ‘블랙’하지도 않습니다. (그러고보니 이것도 신화의 일종이군요.ㅋ)

블랙박스라는 개념은 1940년대 전자회로 개발분야에서 처음 나온 말로 ‘중간 처리과정을 알 수 없는 시스템’을 말합니다. 블랙박스는 이후 정보처리나 심리학 등에서도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자극과 반응처럼 검증 가능한 것만 분석대상으로 삼았던 행동주의 심리학을 사람들은 ‘블랙박스 심리학’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자극이 어떻게 반응으로 전환되어 나오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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