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문명과 문자의 탄생

This article is published on

This article belongs to the category

To read this article you need time

3분

This article received readers’ responses

0

This article consists of keywords

19세기 유럽의 고고학자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바빌로니아 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기이한 유물들을 발견한다. 기존에 알려져있던 바빌론과 앗씨리아보다 더 오래된, 이들과 전혀 다른 문명이 존재했다는 놀라운 사실이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류최초의 문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수메르’문명이다. 

500만 년전 대지진으로 인해 숲이 소멸한 동아프리카 대지구대에서 탄생한 현생인류는 / 6만5000년 전쯤 이주를 시작하여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전세계로 퍼져 나간다. (한반도에는 4-5만년 전쯤 도착한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있는 비옥한 평야에서 무리지어 살던 이들은 자연스럽게 촌락을 형성하면서 느슨한 연맹체를 이루었다. 농업생산량이 폭증하기 시작하면서 공동관개시설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우룩Uruk과 우르Ur는 / 도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규모가 상당히 컸다. 

초창기에는 우바이드(El Obeid)가 문명의 중심 역할을 했으나 이후 우룩(Uruk)과 우르(Ur), 나중에는 라가시(Lagash)로 이동한다 

농경이 발전하면서 수확한 곡물과 가축을 사고파는 거래도 점차 활발해지고 복잡해졌다. 예컨대 보리와 양, 또는 염소와 귀리를 교환해야 할 일이 발생했는데, 이러한 상품들을 일관성있는 가치로 교환하기 위해서는 교환과정을 기록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수메르인들이 찾아낸 해법은 바로 끝이 뾰족한 막대기로 젖은 점토판을 눌렀을 때 생기는 쐐기모양 홈을 이용해 의미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머지않아 인류최초의 문자로 발전한다. 

최초의 문자가 탄생하다 

하지만 처음에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이 발명해낸 문자언어의 잠재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참배자가 신전에 올린 올리브기름 단지가 몇 개인지, 제물로 바친 숫양이 몇 마리인지 기록하는 수단으로 문자를 사용했을 뿐이다. 

최초의 쐐기문자 돌판. 지금부터 5000년 전(BC3100) 작성된 것이다. 맥주 분배량을 기록한 것으로, 수메르인들은 맥주광이었다. 

머지않아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이 발명해낸 문자가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한 혁신을 체계적으로 전수하기 위하여 학교를 만들었다. 글씨를 ‘찍어내는’ 일을 하는 필경사들은 매우 영향력이 높은 계급으로 부상했고, 도시가 번성하면서 이들의 위상 또한 커졌다. 

쐐기문자는 처음에 그림을 본떠 만들었으나 점차 추상적으로 발전하였고, 생각, 개념, 대상, 행위 등을 표상하는 양식화된 시각적 기호로 발전해나갔다. 

수메르의 쐐기문자. 기원전 26세기. 아직은 상형문자 요소가 많다. 

기원전 2300년쯤 수메르는 북방에서 내려온 아카드인들에 의해 멸망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주인이 된 아카드인들은 수메르의 발전된 문화를 거의 그대로 물려받는다. 하지만 수메르인들과 언어가 달랐기 때문에 그들은 수메르의 쐐기문자를 그대로 쓸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수메르의 쐐기문자를 자신들의 언어에 맞게 고쳐써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림을 모방하는 상형요소는 상당부분 제거되고 소리를 표시하는 ‘표음’기능이 대폭 강화된다. 

텔엘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쐐기문자돌판. 기원전 14세기. 앗시리아의 왕 아슈르우발리트Ashur-uballit가 이집트왕에게 보낸 친서. 추상적인 기호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여신들의 세상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문자까지 발명하며 인류최초의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인들은 무수한 신들을 상상해냈다. 그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한 신들은 모두 여신이었다. 

사랑, 아름다움, 풍요, 지혜, 정의, 권력을 상징하는 여신 이난나Inanna. 

이난나는 특히 수메르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이었다. 쉬지 않고 세상을 모험하며, 하늘의 권좌에 앉아 판결을 내리고 인간의 운명을 다스린다. 이난나의 토템은 올빼미로, 지혜를 상징한다. (미네르바) 이난나는 이후 무수한 여신의 원형이 된다.

BC18세기 경 바빌로니아의 이슈타르(또는 에레슈키갈Ereshkigal) 조각상. 사자와 올빼미가 보인다. 이난나는 그리스로 건너가 미네르바, 비너스 등 다양한 여신의 원형이 된다. 

수메르인들은 신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혼인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난나의 배우자는 두무지로, 겨울이 오면 죽었다가 봄이 오면 이난나가 다시 살려낸다. 매우 활동적인 이난나에 비해 두무지는 매우 수동적인 역할만 했다. 이난나는 가정을 돌보는 의무를 전혀 지지 않고 젊은 남자처럼 자유롭게 살았다. 

이난나Inanna와 두무지Dumuzi의 히에로가모스
히에로가모스 Hieros gamos (신성결혼) 

봄이 되어 다시 되살아난 두무지와 이난나의 합방은 풍요로운 결실을 얻기 위한 신성한 행위로 여겨졌다. 히에로가모스는 곧 인간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로 여겨졌기에, 수메르인들은 봄마다 히에로가모스를 매우 중요한 종교적 의례로 여겼다. 

이 때 가장 상징적인 의식은, 수메르의 왕은 두무지 역할을 하고 백성 중에서 가장 뛰어난 외모를 지닌 여성을 이난나로 간택하여 첫날밤을 치르는 것이었다. 수메르인들은 이러한 의례가 풍작을 가져다주며 인간이든 동물이든 다산할 수 있는 행운을 안겨준다고 생각했다. 이 의식을 잘 치러야만 왕으로서 통치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수메르에서는 여신들이 높은 지위를 누렸던 만큼 여자들의 지위도 상당히 높았다. 사회 전반에 여성적 지혜가 존중받았다. 

이 글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남겨주세요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워드프레스닷컴에서 웹사이트 또는 블로그 만들기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