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메르를 무너뜨린 아카드인들 역시 수메르의 신화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하지만 수메르문명을 무너뜨리고 500년 쯤 지났을 때 아카드의 성직자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신화를 만들어낸다.

아카드의 창세신화는 수메르의 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이후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는 바빌로니아를 비롯한 대제국들의 창세-건국신화가 되어 이후 1000년 동안 매년 봄마다 암송되었다. 결국, 아카드인들의 창세신화는 성경을 비롯하여 오늘날 서양문명을 관통하는 원형적인 신화가 되었다.
아카드-바빌로니아의 창세신화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태고의 여신 티아맛이 존재했다. 티아맛Tiamat은 세상의 근원을 상징하는 어머니 여신으로 신 중의 신이다. 그녀의 본질은 바다의 소금물로, 흔히 인간의 모습이나 바닷뱀 모습으로 현현한다.
어느날 티아맛의 자궁에서 젊은 신들이 광란의 축제를 벌인다. 그들의 떠들썩한 파티는 티아맛을 곤혹스럽게 했고, 티아맛의 배우자 압수Apsu도 화가 났다.
잠도 못 자고 며칠 밤을 고생하던 압수는 젊은 신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티아맛에게 말한다. 티아맛은 압수를 나무라며 아직 어린 놈들이라 그런 것이니 좀 봐주자고 설득한다.
문제가 지속되자 결국 티아맛과 압수는 격렬한 부부싸움을 한다. 천둥처럼 울리는 싸움소리를 듣고 자신들의 생명에 위협을 느낀 젊은 신들은 결국 압수를 살해해버린다.
압수가 죽은 자리에서 마르둑이라는 신이 태어난다. 바람을 자유자재로 부릴 줄 알았던 마르둑은 바람을 이용해 티아맛의 바다에 격랑을 일으킨다. 뱃속에서 난장을 피우는 젊은 신들도 신경쓰이는 판에, 폭풍까지 몰아치니 티아맛은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마침내 뱃속의 젊은 신들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선언한다. 티아맛 뱃속에 있던 젊은 신들은 겁에 질린다.
티아맛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신은 없었다. 티아맛과 맞서는 순간 그 어떤 신도 생명을 부지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이제 완전히 성장한 마르둑이 티아맛에 맞서 자신이 대신 싸우겠다고 자원한 것이다. 그 대신 자신이 티아맛을 이기면 자신을 최고 신으로 섬길 것을 젊은 신들에게 요구한다. 계약은 성사되었다.
싸우기 전에 티아맛과 마르둑은 먼저 상대방을 조롱하며 말싸움을 한다.
“몸에 맞지도 않는 바지를 입고 있는 꼴 좀 봐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마르둑(사실상 티아맛의 아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몸집만 크면 다냐? 재수없다.”
마침내 엄청난 싸움이 벌어진다. 다른 신들은 움츠린 채 숨죽이고 지켜보기만 했다.

싸움은 예상대로 티아맛의 승리로 끝났고, 다 죽어가는 마르둑을 티아맛이 삼키려 한다. 하지만 그 순간 마르둑은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어쨌든 바람과 폭풍의 신이었던 마르둑은 티아맛 입속으로 소용돌이 7개를 일으켜 집어넣는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 소용돌이로 인해 티아맛의 배는 크게 부풀어 올랐고, 갑작스럽게 커진 배에 놀라 허둥대는 사이, 정신을 차린 마르둑은 티아맛의 배를 향해 재빨리 활시위를 당긴다. 부풀어 오르던 배가 터지고 심장이 쪼개졌다. 마르둑이 승리한 것이다.
마르둑은 티아맛의 거대한 시체를 앞에 놓고 그녀의 사지를 절단하여 우주를 창조한다. 그녀의 엉덩이는 산이 되고 그녀의 젖가슴은 언덕이 되었다. 또 창으로 그녀의 눈알을 찌르자 안와에서 눈물이 쏟아져나왔는데, 이것이 두 개의 거대한 강,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젖가슴을 여기저기 찔러 두 강이 흘러들어갈 수 있는 지류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위대한 어머니의 봉긋한 음부로는 하늘을 떠받치게 만들었다.
마르둑은 티아맛과 동맹관계에 있던 신들을 찾아다니며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머지않아 신들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티아맛이 사라진 뒤 제사 지내는 이들이 줄어 자신들의 생활이 빈곤해졌다는 것이었다.
정치적 궁지에 몰리자 마르둑은 모든 사건의 원인은 킹구Kingu에게 있다고 떠넘긴다. 킹구는 티아맛과 압수 사이에 태어난 자식으로 티아맛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으며, 압수가 죽은 뒤 티아맛과 함께 세상을 통치하던 신이었다. 킹구가 모든 권력을 혼자 누리기 위해 어머니 티아맛을 죽이라고 자신을 부추겼다고 모함했다.
마침내 마르둑의 모함은 성공하여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킹구를 살해하는 의식을 거행한다. 티아맛을 죽이는 데 공모한 모든 이들의 죄책감을 그에게 덮어씌우고 그를 공개처형한다. 마르둑은 자신의 아버지 에아Ea에게 이 불운한 희생자의 살과 피를 반죽하라고 명령한다. 에아는 진흙으로 도자기를 빚듯, 킹구의 피로 물든 고깃덩어리로 무수한 인간들을 빚어낸다.
마르둑은 이 보잘것없는 피조물들에게 티아맛의 사체 위를 기어다니며 살면서, 신에게 음식과 포도주를 갖다 바치도록 한다. 한 마디로 인간들은 짧은 시간 살면서 열심히 일을 해야만 하는 운명을 부여받고 태어난 존재들이다.
누군가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희생당한 킹구는 이후 예수신화의 모티브가 되었고,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원형이 된다.
문자로 기록된 이 최초의 창세신화는 수메르라는 유구한 문명을 무너뜨린 아카드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이 창세신화에 여성혐오와 잔인한 폭력이 깊이 배어있다는 것이다. 배가 부풀어오른 엄마, 즉 임신한 여성을 살해하고 그 육신을 토막내 세상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이 신화는 더 나아가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라는 의식을 심어준다. 우리 인간 자체가 다른 이들의 죄를 대신하여 고통받고 죽임을 당한 위대한 여신의 아들 킹구의 순교로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역사의 비극은, 모함과 혐오와 차별과 폭력과 희생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 신화가 이후 모든 서양문명의 기본적인 서사가 된다는 것이다.
하늘의 위대한 신(God)이 세상의 어지럽히는 괴물(Chaos Monster: 대개 뱀이나 용으로 형상화된다)을 죽이고 세상을 창조하거나 개화시킨다는 이야기는 이후 서양문명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웅서사가 된다. 티아맛과 마르둑 창세신화는 오늘날 기독교 성경 속에도 고스란히 찾을 수 있다.
“그 날, 야훼께서는 날서고 모진 큰 칼을 빼어 들어 도망가는 레비아탄, 꿈틀거리는 레비아탄을 쫓아가 그 바다 괴물을 찔러 죽이시리라.”
이사야 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