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에서 수메르문명이 출현하는 시기에 나일강 유역에서도 또다른 문명이 출현한다. 바로 이집트문명이다. 에디오피아에서 발원하는 나일강은 매년 우기마다 엄청난 양의 물이 흘러내려와 강이 범람하는데, 이렇게 강물에 잠기는 지역은 물이 빠지고나면 비옥한 진흙밭으로 변한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엄청난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축복받은 땅이다.

기원전 3100년 경 수메르인들이 젖은 점토판에 뾰족한 막대를 찍어서 쐐기문자cuneiform를 발명해냈을 무렵, 이집트인들은 그림으로 의미를 표시하는 방법을 고안해낸다. 바로 상형문자hieroglyph다.

추상화된 기호를 글자로 사용하는 메소포타미아문명에 비해 구체적인 그림을 글자로 사용하는 이집트문명은 훨씬 낙관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어떤 창세신화도 여신을 난도질하는 아카드의 창조신화(에누마엘리시)보다 잔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집트의 가장 오래된 창세신화에 따르면, 상류이집트에 사는 독수리여신 네크벳과 하류이집트에 사는 코브라여신 와젯이 혼돈 속에서 나와 세상을 만들어내고 나일강에 의지하여 사람들을 살아가도록 창조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네크벳과 와젯 모두 ‘여신’이라는 사실이다.
독수리vulture는 오늘날 남성성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고대이집트인들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동물의 사체를 먹고 사는 독수리는 죽음을 앞둔 동물 머리 위에서 맴돈다. 이는 반대로, 어떤 동물 머리 위에서 독수리가 맴돌면, 그 동물은 머지 않아 죽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독수리는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이 있다고 믿었다.
서양에서 뱀은 오랫동안 사악함과 유혹의 상징이었지만, 문명의 여명기에는 여성적 에너지를 지닌 긍정적인 표상이었다. 꿈틀꿈틀 움직이는 뱀의 모습은 혼기에 찬 여자가 걸어가는 모습 또는 춤추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섹스를 할 때에도 남자의 기계적인 피스톤운동에 비하면, 여자의 움직임은 뱀과 비슷하다.
뱀은 또한 생명을 떠올리게 하는 세 가지 이미지와 닮았는데 구불구불 흐르는 강, 나무와 식물의 뿌리, 포유동물의 탯줄이다. 어머니·양육자라는 관념을 상징하는 데 ‘탯줄’만큼 적당한 이미지는 찾기 힘들다. 태반의 구불구불한 혈관에서 뻗어 나온 탯줄을 보면 뱀이 생명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뱀은 땅의 틈새나 균열부에 살며 어머니대지와 깊은 유대를 맺고 있다. 주기적으로 허물을 벗고 새롭게 시작하는 뱀의 행태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피조물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으며, 이로써 부활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뱀은 지혜를 상징한다. 뱀의 눈은 신비로운 예지력과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통로다.

기원전 14세기 이집트 투탄카멘 무덤 벽에 새겨진 우로보로스 ouroboros (꼬리를 물고 있는 뱀). 여성의 순환하는 불변성, 온전함, 변화를 상징한다. 우로보로스는 신석기시대 유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중왕국시대(BC 2040-1600)에 들어서면서 이집트에서도 남성적 원리의 창조신화가 인기를 얻으며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남성의 권력이 부각된 창세신화 중 하나로 아툼Atum이 자위를 하여 정액을 내뿜었고, 여기서 8자녀가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툼까지 포함하여 이들 아홉 신을 엔네아드Ennead라고 하는데, 이들 신성가족이 세상을 창조한다. 아툼신화는 네크벳과 와젯이 함께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화가 나온 뒤 1500년이 지난 뒤 생겨났다.
엔네아드 아홉 신은 제각각 자연의 중요한 힘을 대표한다. 그중 하늘의 여신 눗Nut과 대지의 신 겝Geb이 교미하여 물리적 세계를 창조하고 거기에서 살아갈 생명들을 만들어낸다.

눗과 겝은 세 자녀를 낳는데, 첫째 딸 이시스Isis는 이집트의 대표적인 풍요의 여신이다. 신성한 강을 따라 형성된 비옥한 검은 땅을 상징하는 이시스는, 인간에게 농경기술을 전해준다. 둘째 아들 오시리스Osiris는 강의 신으로, 누나 이시스와 연인이자 부부관계를 맺는다. 잘생기고 남자다운 오시리스는 만인의 추앙을 받았다. 셋째 아들 세트Seth는 오시리스를 질투한 사악한 동생이다.

세트는 오시리스를 질투하여 죽인 뒤 시체를 갈가리 찢어 숨겨놓는다. 슬픔에 빠진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유해를 찾아다녔고, 마침내 유해를 찾아낸다. 이시스는 유해를 배에 싣고 이집트로 돌아와 그를 다시 살려낸다. 이로써 이시스는 대지는 물론 생명까지도 부활시킬 수 있는 여신이 된다. 결국 여성적인 사랑이 남성적인 죽음을 이겨낸 신화라 할 수 있다.
오시리스가 부활하는 매년 봄에는 이집트의 가장 중요한 종교예식이 열린다. 물론 가을이 되면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 죽은 자들의 왕 노릇을 하며 살아야 했다.
이시스는 이러한 와중에 (신화의 몇몇 판본에 따르면 남자의 정액을 받지도 않고 :동정녀 신화) 아들 호루스Horus를 낳는다. 이시스는 대부분 어린 호루스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나중에 어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조각상의 원형이 된다.

호루스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존재로서 인간과 신들 사이를 중재했다. 이 시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자신이 호루스의 현현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