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신과 여신들이 어우러져 평화로운 시대를 누리던 이집트에도 마침내 극적인 변화가 찾아온다. 기원전 1700년경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집단이 동쪽사막에서 쳐들어와 하류이집트와 중류이집트를 정복하고 150년 동안 지배한다. 역사학자들은 이 침입자들을 가나안에서 내려온 셈계 힉소스Hyksos라고 추측한다. 힉소스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속하는 민족으로 추정된다.
150년 뒤 이집트는 힉소스를 몰아내는 데 성공하고 신왕국시대(BC 1550-700)를 시작한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와 사상의 세례를 한껏 받은 이집트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다. 예컨대 투트모세 1세, 투트모세 3세, 람세스 2세와 같은 영토확장 전쟁에 나서는 군주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이 정복한 땅에 장엄한 기념물을 세웠다.
또한 신왕국의 필경사들은 상형문자 대신 신관문자hieratic script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소리를 표기하는 추상적인 문자였다.


신의 질서에도 극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신왕국 초기 투트모세 3세는(BC1490-1426) 남신 아몬을 최고의 신으로 격상시키고, 신들의 모습을 인간의 형상으로만 묘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몬을 형상화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집트 전통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신’이라는 개념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것이다.
여신의 지위도 크게 변한다. 초기왕조에서 최고의 지위를 누리던 네크벳(독수리), 와젯(코브라), 눗(하늘), 하토르(암소)와 같은 신들은 모두 출산, 다산, 아이들의 수호자였다. 중왕조에서는 자연의 순환을 신격화한 이시스가 여성성, 다산성, 모성의 상징이었다. 반면 신왕국시대에 와서는 이전에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던 한 여신을 발굴해 최고의 여신으로 끌어올린다. 이는 형상이 없는 신의 등장 못지않게 매우 놀라운 사건인데, 왜냐하면 이 여신은 자연과 무관한 신이었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진리’의 여신 마앗Maat이다. 마앗은 원래 무수한 다산과 자연의 여신 중 하나였지만, 새로 정립된 마앗의 상징은 법, 진리, 질서, 정의와 같은 추상적인 가치였다. 마앗은 죽은 이의 심장을 정의의 저울 한쪽 접시에 올려놓고 반대쪽 접시에 자신의 타조깃털을 올려놓아 죽은 자의 도덕성을 쟀다.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면, 저울은 균형을 유지한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어느 신의 연인도 아닌, 자웅동체의 신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전반적인 사회변화에 발맞춰 이집트는 서서히 가부장제 사회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왕국의 18대왕조에 지극히 기괴한 파라오가 등장하여 일대 혼란을 일으킨다.
아멘호텝 4세Amenhotep IV는 어릴 때는 병약했으나 운 좋게도 10대에 이집트 최고의 권좌에 오른다. 그는 사냥, 전쟁, 정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이집트의 종교와 문자체계를 개혁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 젊은 지배자는 아몬숭배를 경멸했다. 당시 성직자들은 과도한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집트의 만신전을 뒤엎는다. 그는 먼저 아톤Aton이라는 무명의 신을 최고 신으로 격상시킨 뒤 신하들에게 아톤만을 섬기라고 명령한다. 아톤은 경쟁자 아몬처럼 이미지가 없다. 하지만 아몬보다 훨씬 숭고하고 강력한 신으로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한다고 선포한다.
전통을 완전히 단절하고 싶어했던 아멘호텝 4세는 자신이 만들어낸 신 아톤에 복종한다는 뜻으로 자신의 이름을 아크나톤Akhenaton으로 바꾼다. 또한 기존의 신을 믿는 사람은 모두 처벌한다. 일반인들 사이에 여전히 남아있던 이시스와 오시리스 신앙도 금지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다듬어진 풍요로운 종교의례와 신앙을 거의 하루아침에 없애버렸다.


역사상 최초의 유일신숭배자 아크나톤Akhenaton과 왕비 네페르티티 Nefertiti.
형상없는 신에 대한 믿음을 대중에게 설득할 수 없다는 불평에 아크나톤은 결국 빛을 뿜어내는 태양을 상징하는 텅 빈 원으로 아톤을 표시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또한 아톤이 마앗을 배우자로 선택했다고 밝힘으로써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을 하기도 한다.
이전의 신화와 연관된 장식, 맥락, 형상이 모조리 사라지고 이제 텅 빈 원에서 뻗어 나오는 직선과 빈약한 신관문자로 쓰여진 찬송가만 남았다.
고대로부터 창조성의 배출구 역할을 하던 종교예술이 완전히 금지되자, 역설적으로 고차원적인 예술이 만개한다. 아크나톤 부부의 흉상이나 예배하는 모습, 일상적인 모습을 묘사하는 작품들을 보면 이 시대 예술이 이집트역사상 정형화된 전통적인 규범에서 벗어난 유일한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7년간 이어진 아크나톤의 철권통치 이후 왕위에 오른 어린 왕은 아크나톤의 종교혁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자들의 부추김 속에서 아톤 숭배의식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기존의 관습을 복권한다.
역사학자들은 아크나톤을 역사상 최초로 유일신숭배자라고 평가한다. 물론 아톤에게 드리는 예배에 마앗이 늘 함께 등장했기에 완벽한 1신교는 아니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고대이집트는 인류역사상 여자들이 가장 높은 지위와 권리를 누렸던 문명으로 남았다. 여자들의 행동에 어떠한 제약도 없었다. 이집트벽화를 보면, 여자들은 공공장소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음식을 먹고 마셨으며, 길거리를 혼자 활보할 수 있었고, 무역이나 생산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다.
기원전 2세기 이집트를 방문한 그리스인 디오도로스 시쿨로스Diodorus Siculus는 ‘이집트에서는 결혼서약할 때 남편이 아내에게 순종을 맹세한다’고 기록했다.
이집트왕족들이 남매끼리 결혼하는 일이 많았던 이유 역시, 상속 때문이었다. 이집트에서는 대부분 재산을 어머니가 딸에게 상속했다. 그래서 연애를 할 때도 자연스럽게 여자가 주도권을 차지했다. 이집트의 연애시나 연애편지를 보면 대부분 남자가 여자에게 쓴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 쓴 것이다. 여자가 먼저 만나자고 하고, 구애하고, 청혼했다.
“이집트인들처럼 사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가! 그곳에서는 남편들이 집에서 베를 짜고, 아내가 밖에 나가 일용할 빵을 벌어온단다.”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가 아들에게 하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