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전쟁과 아나밥티스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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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co Toucan

신약은 농민들에게 계시와도 같았다. 신약을 직접 읽게 되면서, 예수가 어떻게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섰는지 깨달았고, 자신들이 땅의 주인이라는 예수의 예언을 알게 되었다. 많은 독일인들이 가톨릭의 권위에 대한 루터의 저항을 사회개혁에 대한 요구라고 해석했다. 그들은 성서를 혁명안내서로 둔갑시켰고, 루터를 자신들의 대의를 앞장서서 밀고나가는 혁명가로 인식했다.

종교개혁이 시작될 때 독일 땅의 3분의 1 이상을 가톨릭교회가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는 귀족과 부유한 몇몇 가문이 가지고 있었다. 농민과 노동자들은 결국 자신들을 계속 빈곤 속으로 밀어넣는 사회구조에 맞서 일제히 봉기하는데, 이것이 바로 농민전쟁이다(1524-26). 독일 전역에서 곡괭이와 쇠스랑으로 무장한 농민과 노동자들이, 성당과 귀족의 성 앞으로 몰려들어 대치했다. 1524년 말에 이르렀을 때 세금 내기를 거부하는 농민이 3만 명에 육박했다.

농노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것으로 유명했던 루트비히 폰 헬펜슈타인 백작Count Ludwig von Helfenstein은 당시 공공의 적이었다. 그는 곤봉과 단검으로 무장한 신하들의 보호를 받으며 농민들과 맞서다 결국 농민들에게 에워싸이고 만다. 농민들 무리 속을 빠져나가려 애썼지만 분노한 농민들은 그들을 마구 공격하며 욕을 쏟아냈다.

모자를 벗어 예를 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네 놈이 우리 형을 지하감옥에 쳐넣었지

농장에 들어온 산토끼를 죽였다는 이유로 우리 아버지 양팔을 잘랐어.

네 놈의 말과 개와 사냥꾼이 우리 밭을 다 짓밟아놓았지.

백작은 농민들 무리 속을 겨우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이 때 입은 부상으로 죽고 만다. 이러한 소요는 건초에 붙은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무수한 전제군주들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루터는 이러한 무정부사태에 경악했으며, 종교개혁 때문에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는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 군주들을 지지하고 나선다. 루터는 자신이 농부라고 했지만 실제로 농민들이ㅏ 처한 곤경에 대해서는 전혀 연민을 보이지 않았다. 1525년에는 〈약탈과 살해를 일삼는 농민무리들에 반대하며〉라는 소책자도 출간한다. 그는 농부들을 개떼에 비유했다.

은밀하게든 공개적으로든 누구든 패고 찌르고 잘라 죽여야 한다… 폭도보다 해롭고 위험하고 사악한 것은 없다. 미친개는 죽여야 한다.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공격당할 것이다.

The Works of Martin Luther, 4: 248-54

선동적인 이 소책자는, 교회와 세속권력이 농민들의 갑작스런 봉기에 어쩔 줄 모르고 당하고만 있다가 정신을 차릴 때쯤 유포되었다. 이 팸플릿은, 자신들 편이라고 생각했던 종교개혁세력이 자신들의 가장 악날한 적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루터에 대한 농민들의 증오심은 하늘을 찔렀고, 루터는 비텐베르크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럼에도 루터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농민이 모조리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농민을 죽이는 것이 군주나 왕을 죽이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하다. 그 촌놈들은 그 어떤 신성한 권위도 없이 칼만 마구 휘둘러댈 뿐이다.

Preserved Smith, The Life and Letters of Martin Luther, 165

이러한 답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거친 언어폭력이며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만든다고 생각한다면, 제대로 생각한 것이다. 그 주둥아리에 돌려주고 싶은 대답은 코피가 나도록 주먹을 갈기는 것이다. 농민들은 들으려하지 않는다… 그들의 귓구멍은 총알로 뚫어야 한다. 머리통이 몸뚱이에서 튕겨나가도 상관없다. 말 안 듣는 학생에게는 회초리가 답이 다. 자상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줄 때 듣지 않으려는 자는 도끼를 든 망나니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이다… 자비에 대해 나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알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하느님의 말씀 속 의지에 귀 기울일 뿐이다… 하느님이 자비가 아닌 진노를 보이신다면, 자비는 어디다 쓰겠는가?

The Works of Martin Luther, 4: 261-72

농민전쟁의 피해는 엄청났다. 독일 전역에서 13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으며, 이 중에서 공개처형으로 죽은 사람만 1만 명에 달했다. 농민반란을 진압한 이후에도 이들에 대한 보복은 한동안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 귀족은 이런 걱정을 하기도 했다.

반란자들을 이렇게 죽이다간, 우리를 위해 일해 줄 농부는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Cambridge Modern History, 11: 191

농민전쟁 기간 동안 무수한 수도원, 교회, 성들이 잿더미로 변했으며,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망가지고 부서졌다. 농민들의 집도 모두 파괴되어 5만 명이 집을 잃고 숲과 산속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 과부와 고아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구걸을 했지만 누구도 자선을 베풀지 않았다. 신약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도래한 세상은, 천국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아나밥티스트 학살

종교개혁 이후 다양한 프로테스탄트 교파가 등장하는데, 그중에 아나밥티스트가 있다. 독일어를 쓰는 지역 남부의 순박한 농민들 사이에서 시작된 이 교파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는 것이 교리의 핵심이다.

아나밥티스트Anabaptist는 ‘다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들은 유아세례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어른이 된 뒤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어린 아기에게 베푸는 세례는 자신도 기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른이 된 다음에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주장이다. 그래서 이들 교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이들은 종교적 관용, 비폭력, 평화를 옹호했다. 일부일처제를 유지했지만, 아이는 공동으로 길렀다. 정치, 금융, 상거래, 송사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족적인 농촌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서로 ‘형제의 지킴이brother’s keeper’이라고 불렀다. 자기 재산의 10분의 1을 공동재산으로 바쳤고, 농기구, 생필품, 노동력, 땅을 공유했다.

문제는, 이러한 행태가 그들에게 땅을 빌려준 부재지주들absentee landlords의 눈에 거슬렸다는 것이다. 이들의 행태는 토지소유권을 세습함으로써 구축한 기득권과 또 이에 기반한 사회구조 자체를 흔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은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그들은 이 온화하고 평화로운 프로테스탄트들을 진정한 기독교운동이라고 갈채를 보내기는커녕,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 편에 서서 그들을 비난한다. 예컨대 1529년 슈파이어의회에 참석한 성직자들은 아나밥티스트를 발견하는 즉시 그 자리에서 짐승처럼 잡아 죽여야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아나밥티스트는 이단이며, 이들의 교리는 너무나 극악하여 재판에 회부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나밥티스트가 처음 문제가 될 때 루터는 이들을 옹호했지만, 이들이 꾸준히 확산되어 자신의 교세를 위협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태도를 뒤집어 군주들에게 그들을 죽이라고 요청한다. 자신의 급작스러운 돌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루터는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철저히 정치적 계산이었을 뿐이다. 가톨릭교회와 맞서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군주들이 돌아서면 자신이 위태로워질 수 있고, 또 자신의 교세도 크게 위축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루터의 주장은 자기모순적인 것이었다. 성서에 구체적으로 쓰여있지 않은 것은 모조리 폐기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일어선 그였지만, 유아세례는 신약에도 구약에도 나오지 않는 개념이다.

칼뱅 역시 초기에는 아나밥티스트운동에 연민을 가졌으나, 나중에는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뱅의 행동대장 마르틴 부처Martin Bucer는, 아나밥티스들은 “살인자보다 사악한” 종자이기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아이든 모조리 잡아죽이라고 교인들을 획책한다.

교황 역시 이들을 이단으로 여겼으며, 세속의 권력자들에게 이들을 엄단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대다수 가톨릭 성직자들이나 에라스무스 같은 휴머니스트들은 이 근면한 농민들이 양 떼에서 벗어나 잠시 길을 잃은 것일 뿐이니, 영주들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귀족 중에도 아나밥티스트들을 자신의 영지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누구보다도 양심적이고 근면하게 노동하는 선량한 농민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나밥티스트 색출

하지만 1528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5세는 어른에게 세례를 주는 행위는 중범죄라는 포고령을 내린다. 결국 아나밥티스트를 에워싼 사나운 사냥개들의 신경질적인 으르렁거림은 더 격렬하게 울려퍼져나갔다. 아나밥티스트를 연구한 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기록한다.

어떤 이들은 벽에 매달려 사지가 찢어지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불에 타 재가 되었고, 또 어떤 이들은 기둥에 묶여 구워졌다…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이기도 했고… 칼로 머리통을 베기도 했다… 어두운 감옥에서 굶어죽어 시체로 썩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죽이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여겨지는 아이들은 회초리로 매질을 한 뒤 몇 년 동안 지하 감옥에 가뒀다… 뜨거운 꼬챙이로 뺨에 구멍을 뚫었다… 또 많은 이들을 잡아서 낯선 곳으로 강제로 이주시키기도 했다. 낮에는 날지 않는 올빼미나 까마귀처럼 그들은 바위 틈, 숲속, 동굴 같은 곳에서 숨어 살아야만 했다.

Karl Kautsky, Communism in Central Europe, 187

이러한 끔찍한 박해 속에서도 네덜란드, 영국, 독일에서 끊임없이 아나밥티스트 공동체가 생겨났다. 오늘날 퀘이커, 아미쉬, 메노나이트와 같은 교파들이 아나밥티스트에서 유래한 교파들이다.

이 무의미한 살육의 시기를 거치면서 독일사람 중 3분의 1 이상이 죽고, 경제적 기반은 완전히 망가진다. 하지만 농민전쟁과 아나밥티스트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인한 혼란은 얼마 뒤 루터추종자들과 칼뱅추종자들이 서로 죽고 죽이면서 시작된 30년전쟁(1618-48)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아나밥티스트들을 뒤주(배럴)에 넣어 죽이는 루터교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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