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말 미국은 바야흐로 수사학의 르네상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매년 수십 종의 그리스로마 수사학 저술들을 번역출간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출발한 고전수사학이 본격적으로 부활했다. 마치 자신들에게 부재하는 글쓰기전통을 빠르게 채워 넣고자 하는 듯, 미국대학들은 고전수사학의 내용과 형식을 대대적으로 차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미국의 글쓰기 연구는 고대그리스 이소크라테스 학파의 문체술까 지 거슬러올라가 전통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수사학 rhetoric
그리스전통에 따라 간단히 정의하자면 수사학이란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 하는 기술’이다. (번역어 ‘수사’는 ‘말辭을 꾸미는修 법’이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를 ‘실용적인 설득의 기술’ 이라고 정의하며 수사의 핵심요소로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를 꼽는다. 남을 설득하는 궁극적인 소통기술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논리(logos)뿐만 아니라, 청자의 감정과 욕망(pathos), 화자의 인격과 윤리성(ethos)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시민활동 속에서 벌어지는 ‘말로 하는 논증’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형식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오늘날 논증에서 가장 기본적인 뼈대가 되는 유형은 변론과 토론이며, 이 두 가지 논증을 우리는 개념논증/실용논증으로 구분한다.

물론 ‘가치’를 기본적인 논증유형에서 뺀 것은 그것이 가치없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개념논증이든 실용논증이든, 말을 하든 글을 쓰든 화자는 독자/청자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가치를 발산한다. 논리적인 주장을 펼치려면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고 흔히들 이야기하지만, 논증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를 어떻게 틀을 짤 것인지 결정할 때, 또 논증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선택할 때 감정은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사실 논증은 이미 반세기 전 주요한 설득의 방법론으로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다. 1914년 몇몇 영문학과 교수들이 대중연설public speaking을 연구하는 학회를 설립하였는데, 이때 처음으로 논증의 실용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고전수사학에서처럼, 구술언어로 이뤄진 대중연설에서 설득력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자원으로서 논증을 주목한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 고전수사학이 부활했을 때 관심은 단순히 말뿐만 아니라 글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의사소통행위로 확장된 상태였다. 구술언어는 물론 문자언어로 전개되는 사회적 소통행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활용할 수 있는 설득의 기술은 어쨌든 논증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우선 대중연설과 같은 구술담화가 채택하는 논증은 초기 그리스수사학의 원시적인 형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연설을 비롯한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논증뿐만 아니라 청중의 감정이입pathos과 말하는 사람의 개성이나 인격ethos 같은 비언어적 요소가 매우 중요한 설득의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대화행위speech act에서 논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비언어적 요소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기법이 갈수록 발전하면서 논증이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줄어들었다.

반면 글에서는 이러한 비언어적인 요소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는 측면에서 논증을 정교하게 짜고 펼쳐 나가는 전략이 설득력을 크게 좌우한다. 특히 글쓰기는 한번도 보지 못한, 또 앞으로 거의 볼 일이 없는 독자라는 가상의 상대방을 앞에 놓고 설득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결국 이러한 치명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논증을 극대화하고 정교화하는 것이다.
문제는, 대화나 연설에 적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고전수사학의 ‘논증’이라는 개념은 글에 적용하기에 너무나 허술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일상에서 자연어를 통해 전개되는 논증을 글쓰기에 접목하고 정교화하는 작업이 필요한데, 이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는 바로 스티픈 툴민Stephen Toulmin이 창시한 비형식논리학이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