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일반적인 종교적 관념을 돌아보면, 이스라엘사람들의 일신교적 세계관이 얼마나 극단적 편견인지 알 수 있다.
다신교와 일신교
다신교에는 다양한 서열이 있다. 국가신, 지방신, 가족신, 더 나아가 개개인마다 신이 있다. 사람마다 자신의 신이 있고, 따라서 자신의 신이 존중받기를 바라는 만큼 다른 사람의 신도 존중한다. 이것은 고대세계의 황금률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종교와 교류하고 또 그러한 교류 속에서 새로운 신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혜와 정의의 신 토트Thoth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우주의 창조자이자 장인들의 신 프타Ptah의 사원을 약탈하거나 불지른 일은 한 번도 없다. 마르둑 신봉자들이 바알 숭배자들을 죽이려 한 적도 없다. 전쟁의 신 아레스 숭배자과 그에 못지않게 호전적인 아폴론 숭배자들이 싸운 일도 없다.
일신교는 인간사회를 반영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홀로 존재하는 신,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것도 아니고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혼자일 수밖에 없는 신은, 무리지어 사는 우리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 이스라엘의 신에게는 아내도, 자식도, 애미애비도 없다.
어떠한 형상도 갖지 않은 유일신은 고도로 추상적인 개념이다. 추상성은 논리적 추론의 핵심적인 요소로, 논리적 추론은 사람들을 미신에서 벗어나게 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추상적인 신을 숭배하는 것에는 끔찍한 대가가 따른다. 다신교 문화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맹렬함과 투철함으로 무장한 잔인한 전사들이 탄생한 것이다.
고대세계에서는 낯선 이방인들을 죽였다. 외모가 다르거나 옷을 입는 방식이 다르거나 말이나 행동이 다른 사람들을 죽였다. 유일신 세계에서는 자신과 다른 ‘추상적인 관념’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옆집이웃을 죽였다. 식량이나 말을 훔쳐오기 위해 다른 마을을 습격하는 것은 그래도 납득할 수 있는 일이지만, 종교나 철학 같은 추상적 가치 때문에 서로 죽고죽이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유일신교는 또한 치명적인 허점이 있 다. 모든 사람이 신이 하나만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그들 개개인이 떠올리는 신은 정말 같은 것일까? 같은 교회에 10명이 다닌다고 하더라도 그 10명이 받드는 하나님이 모두 똑같을까? 내가 믿는 신이 당신이 믿는 신과 같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무자비한 사상검증(간증)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 인류가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지금까지 치룬 고통을 떠올려 보면, 고대의 다양한 종교들을 원시적이라고 마냥 단정해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일신교가 인류를 계몽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지만, 그 대신 우리가 지불한 대가는 참혹하기 이를 데가 없다. 하나님, 예수, 알라의 이름으로 벌인 온갖 종교전쟁으로 죽은 사람들, 또 마녀로 몰려 산 채로 불길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 놓는다면, 어마어마한 산을 이룰 것이다.

신은 하나여야 한다는 딜레마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냈다는 사도바울의 주장은 언뜻 보기에는 매우 그럴듯 해보였다. 제우스가 인간 세멜레를 통해 디오니소스를 낳았다는 신화를 비롯하여 신과 인간이 통정하여 아기를 낳는 이야기는 이미 고대인들에게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유일신 하느님을 핵가족의 가장으로 바꾸고나니 골치아픈 문제가 발생했다. 기독교는 더 이상 1신교가 아니라는 지적을 받게 된 것이다. ‘신은 오로지 하나’라는 (유대교에서 가져온) 기독교의 존립근거가 되는 교리의 뿌리(일신교)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이 문제를 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바울은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논리를 꾸며내 이 문제를 해결한(것처럼 포장한)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인 동시에 하느님 자신이기 때문에, 여전히 신은 하나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기이한 신학적 해설은, 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오늘날까지도—무수한 사람들 사이에 풀리지 않는 논쟁이 되었다. 더 나아가 바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이유만으로, 이후 무수한 사람들이 서로 쳐죽이는 비참한 살육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바울은 다신론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또다른 실체를 하나 더 만들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끼워넣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이다. 성령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바울은 왜 이러한 선택을 했을까? 그것은 비유를 들면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남자가 어린 남자아이와 손을 잡고 있는 사진을 건네주었다. 누가 보기에도 이 둘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인 것으로 보인다. 이 부자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사진에 나와있지 않은 엄마가 누구인지 궁금해 할 것이 자명하다.

바울은 이 자리에 여자가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성스러운 아버지와 성스러운 아들이 있고, 이들 사이에 엄마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성스러운 영혼을 넣는다. 아버지와 아들은 남자다. 영혼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pneuma는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중성명사다.

하느님과 예수만 신성가족으로 남겨놓았다면 언제든 엄마자리에 여신이 들어올 수 있었기에 이 자리를 ‘성령’이라고 하는 모호한 실체를 끼워넣어 사도바울은 3위1체 핵가족을 완성했다.

문맹과 여신의 부활
암흑 속에서 6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 유럽에 다시 문자의 불이 환하게 켜졌을 때,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무수한 사람들이 마리아를 향해 예배하는 것이다. 모든 유럽인들이 마리아를 향해 기도했고 마리아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신기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3위1체에 들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주요한 성인으로 여겨지지도 않던 마리아가 최고신의 지위에 서 있는 매우 낯선 기독교가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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