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성전 건축과 세상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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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46년 카르타고(페니키아)를 멸망시킨 로마는 지중해를 둘러싼 지역을 모두 정복한다. 로마제국은 유대지역의 통치를 헤롯Herod에게 맡긴다. 유대인이 아니었던 헤롯은 이 지역 민심을 잡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솔로몬성전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성전 재건

실제로 헤롯이 건설한 새로운 예루살렘성전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장장 8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완공된 헤롯신전은 실제로 로마제국 내에서 3대 신전으로 손꼽힐 정도로 웅장하고 거대했다.

로마제국 3대신전 중 하나인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신전 상상도. 401년 완전히 파괴되었다.

웅장한 예루살렘성전이 완성되면서 종교적인 의식은 더욱 거창해져갔다. 매일 사제 700명이 야훼를 받드는 제단을 차리고 무수한 동물을 산채로 죽여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거행했다. 공포에 질린 동물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 터져나오는 가운데 뿔피리소리가 울려퍼지면 사제들은 일제히 동물의 목에 칼을 내려꽂았다. 신전바닥은 피로 흥건했고 동물을 불에 그슬리면서 나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BC1000년 솔로몬이 지은 성전과 AD60년경 완공된 헤롯이 지은 성전 비교. 헤롯성전은 2만3,000여 제곱미터 면적에 자리한 복합 건물로 총 길이 1.5킬로미터에 달하는 장벽으로 둘러싸여있었다.

이처럼 제사가 성행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형식과 기교는 더욱 전문화되어갔고, 제사를 집행하는 사제들의 권위 역시 갈수록 높아졌다. 유대사회에서 희생제의를 전문적으로 집행하던 이들은 사두개Sadducee인들이었다. 헤롯성전이 완성되고 난 뒤 이들은 유대인들의 최고권력기관이라 할 수 있는 ‘산헤드린’도 장악하여 최고 지배층이 된다.

예루살렘성전 상상도

구약을 바탕으로 율법을 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대중을 교화시키고자 했던 바리세는 끊임없이 사두개와 대립했다. 사두개는 자신들만의 전문직(제사)을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민중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귀족이었던 반면, 바리세는 구약을 연구하고 율법을 설파하여 민중을 가르치고 교화하고자 하는 지식인계급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신약성경에서 예수와 끊임없이 싸우는 사람들은 모두 바리새인들이다.)

헤롯성전이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예루살렘은 순례객들로 넘쳐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서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한다. 헤롯성전 앞에는 순례객뿐만 아니라 로마에 저항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선동하는 극렬우익분자들도 함께 모여든 것이다. 제국의 안정을 위해 성전을 지어줬더니 오히려 제국의 위협하는 골치거리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특히 페사흐(유월절)가 돌아올 때마다 예루살렘은 순례자들로 넘쳐났는데, 이때마다 폭동이 발생했다. 로마의 지배자들은 예루살렘에 군대를 대폭 증강 배치하여 성전 주변 방위를 강화했다. 이때 파견된 로마군은 대부분 그리스인들로 이뤄져있었다.

헤롯성전은 완공된지 불과 7년 만에 완전히 파괴된다. 서기 70년 유대인들은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고, 로마군이 이를 제압하면서 다시는 유대인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80년 동안 힘들여 지은 성전을 제 손으로 파괴해버린다. 또한 로마제국은 유대인들을 로마제국 전역으로 최대한 뿔뿔이 흩어놓는데, 바로 이때부터 디아스포라가 시작된다.

예루살렘성전이 파괴되면서 사두개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반면, 바리세인들은 끊임없이 율법연구에 전념하여 오늘날 유대교를 지키는 랍비가 된다.

로마제국의 통치술과 관용정책

로마는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그리스에 비해 창조성이 빈곤했음에도 (어쩌면 창조성이 빈곤했기 때문에) 그리스가 유일하게 갖지 못했던 기술을 소유할 수 있었다. 바로 탁월하고 효율적인 조직관리술이다. 실제로 로마는 방대한 지역과 무수한 민족들을 무려 600년 동안이나 아무 탈 없이 통제하고 관리했다.

Pax Romana. 절정기 로마제국의 영토는 325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였으며 인구는 6,000만 명에 달했다.

로마제국은 새롭게 정복한 이들의 불만을 달래고 그들을 더 빠르게 동화시키기 위해 시민권을 주었다. 로마의 시민이 됨으로써 제공받을 수 있는 법적, 상업적, 교육적 기회는 오히려 로마제국에 병합되지 못한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영광스러운 선물이었다.

갈릴리바다와 사해 사이에 위치한 게라사(오늘날 Jerash)에 세워진 로마시대 거대도시 유적.

종교적인 문제에서도 로마인들은 매우 관대했다. 로마인들 스스로 그리스의 신화나 종교의례를 그대로 가져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다른 문화의 종교를 거리낌없이 수용했다.

로마가 피정복민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했다. 로마황제의 초상 앞에서 공개적으로 예의를 갖춰 절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것은 로마(그리스)의 신들을 인정하고, 황제도 그러한 신 중 하나라고 인정한다는 의미였으며, 결국 로마제국에 충성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렇다고 해서 피지배인들이 믿던 원래의 신이나 종교를 버릴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다신교 세계관에서는 어떠한 신이든 종교든 존중받을 자격을 갖기 때문에 새로운 신이 추가된다고 해도 전혀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는 로마인들이 지은 다리. 로마인들의 건축/토목기술은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Wikipedia

로마인들이 요구하는 조건은 지극히 타당하고 합리적인 것이었기에 소수민족들이 제국 안으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을 거부한 유일한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유대인들이다.

‘성서’를 따르는 이 고상한 민족의 유별난 고집을 익히 알고 있던 로마제국은, 이들만은 특별히 예외적으로 인정해 준다. 형상을 금기시하는 유대인들의 풍습을 존중하여 이 지역에서는 로마총독이 군중 사이로 행진할 때 황제의 초상을 가리도록 조치했다. 더 나아가 그들만의 유별난 유일신 신앙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허용한다. (그럼에도 로마제국 전역에서 이들 유대지역에서만 끊임없이 폭동이 일어난다.)

혼란의 시기, 메시아는 오는가?

유대지역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폭동을 방지하기 위해 로마는 반란선동자들을 색출하는 작업에 나선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다시는 반란을 꿈꾸지 못하도록 겁을 주고 싶었다. 이때 로마인들이 생각해낸 것은 바로 반란모의자들을 산채로 매달아 죽이는 것이었다. 로마제국은 BC4년 갈릴리에서 유대인 2,000명을 십자가에 매단다.

로마제국의 온갖 조치에도 민중들의 불안은 오히려 계속 고조되었다. 혼돈의 시기에 불안한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극단적인 교파가 융성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이 바로 에세네Essene파다. 이들은 야훼가 보낸 메시아가 곧 도래하여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설파한다. 메시아가 강림하면 사악한 자들을 한번에 휩쓸어버릴 최후의 전쟁(아마겟돈)이 벌어지는 데 그 때 야훼의 병사가 되어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믿음 위에서 에세네파는 세속의 삶을 모두 버리고 사막에서 집단생활을 하며 군사훈련을 하였다.

이 시기에 세상을 더 흉흉하게 만들었던 것은 점성술이다. 고대의 과학이라 할 수 있는 점성술에서 2000년마다 한 번씩 바뀌는 별자리가 바로 이때 바뀌었기 때문이다. 2000년을 이어온 양자리 시대가 저물고 물고기자리가 새롭게 시작되고 있었다. 무수한 점성술사들, 점장이들이 온갖 예언을 퍼트리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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